247년 왜여왕 히미코 사후에
칠삭동이 신무천황이 즉위했지만,
구수대왕 아들들인 의덕천황과 효소천황과 효안천황 등이 군웅할거 식으로 서로 쟁패하여서 혼란하니
효소천황의 손녀 일여를 왜여왕으로 세워서 평화를 되찾았다.
247년 히미코 여왕 사후의 혼란은 [위지왜인전]에 간략히 기록되어있다. 다시 남왕을 세우니 나라 사람들이 불복하여 다시 서로 죽였다. 신무천황은 257년에 죽었는데 반란으로 전사하였을 가능성도 높다.
다시 여왕을 세우니 비미호의 일가인 일여로서 13세에 왕이 되었고 나라가 평온해졌다.
[위지왜인전] 更立男王 國中不服,更相誅殺,當時殺千餘人 復立卑彌呼宗女壹與,年十三為王,國中遂定
제 2세 천황으로 기록된 수정천황綏靖天皇(243~292)은 이스케요리의 아들이다. 누나가와미神沼河耳命라는 이름은 이즈모出雲 동북의 누나가와沼河에서 유래되었다. 그의 이름으로 보아서 그는 대화大和로부터 이즈모出雲 동북의 누나가와沼河로 쫓겨가서 죽은 것이 된다.
신무천황의 서장자庶長子인 타기시미미當藝志美美命가 신무천황 생전에 국정을 맡아하였는데, 신무천황이 죽자 스스로 천황이 되어, 이스케요리를 후비로 삼으려다가 이스케요리의 아들 수정천황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수정천황이 다음대 천황이 되었는데 그는 50세로 292년에 죽었다.
[주] 고대에 흉노, 몽고, 선비,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은 모두 북방족의 순수 혈통 보전을 위하여 근친결혼이 장려되었고 더불어서 후왕이 즉위하면 전왕의 후비들까지도 후왕이 다시 후비로서 취하는 관습이 있었다. 민가의 형사취수와 비슷한 것이다. 중국에서 수양제는 문제의 후비 때문에 문제를 죽였고, 고구려 호동왕자는 부왕 생전에 부왕의 후비를 넘보다가 죽임을 당했고, 산상왕은 형수를 자신의 왕후로 세웠다. 당고종은 부왕의 후비를 황후로 세웠는데, 바로 측천무후測天武后로서 그녀가 허수아비 황제인 고종을 대신하여서 고구려, 백제와 심지어 당나라까지 3국을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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