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일본사

곤지왕자 왜흥왕

단군천사짱 2006. 1. 10. 21:03
 

461년 백제 개로대왕은 동생 곤지왕자를 보내어 왜흥왕으로 세웠다.

개로대왕과 도미부인의 아들인 성천황자가 곤지대왕의 입성을 거부하자 불태워죽이고 청녕천황이 된다.

곤지왕자는 임신한 개로대왕비와 함께 일본에 가서 개로대왕비를 황태부인으로 올렸고,

개로대왕비가 무녕대왕을 출산하니 일본 각자궁에서 기르게 하였다.

458년 15세에 웅략천황을 사로잡은 곤지왕자昆支王子(444~484)는 백제로 돌아갔다가 461년에 다시 일본으로 왔는데 18세로서 왜흥왕이라고 하였다.

458년부터 일본의 수도에 남아 왜왕의 지위를 누려온 도미부인의 아들 성천황자星川皇子가 성문을 걸어잠그고 곤지대왕의 입성을 거부하였다.

곤지대왕은 성을 태워버려서 성천황자를 죽였다.


이때 곤지왕자는 개로대왕비와 동행하였는데, 그녀는 이중천황의 딸인 반풍황녀飯豊皇女로서 임신중이었고, 무녕대왕을 일본에서 출산하였다.

반풍황녀의 궁은 갈성葛城의 아름다운 각자궁角刺宮이었다.

지금 각자신사角刺神社로 남아있는데 그 아름다움은 당시에도 각자궁을 한번 구경하는 것이 백성들의 소원이었다.

다만 각자궁角刺宮은 부라궁夫羅宮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곤지대왕은 청녕천황이 되어서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에 미카쿠리甕栗宮을 지었다.

왜제왕의 부인이었던 반풍황녀를 백제식으로 황태부인皇太夫人으로 봉하였다. [일본서기]에서 웅략천황의 비인 갈성한원을 황태부인으로 봉하였다는 것은 반풍황녀를 황태부인으로 봉한 것의 오기다. 갈성한원은 황태부인으로 봉하지 않아도 황후다.


청녕천황은 부하장수를 시켜서 웅략천황을 다시 잡아오도록 하였다. 웅략 7년의 기사에서 미모로신三諸岳神을 잡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름을 고무高武에서 고뢰高雷로 바꾸도록 하였다.

의 발음에 “이가스시”가 있는데

[신찬성씨록]에서 다케하라竹原連는 신라국아라라국왕의 동생 이가쓰왕의 후예라고 하였다.

竹原連 新羅國 阿羅羅國主弟 伊賀都君之後也

아라라국주는 안강천황을 가리키는데 신라왕자지만, 윤공천황의 양자였는지 웅략을 그 동생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현재 이가伊賀는 미에현三重縣에 있고 그 중심성은 우에노성上城이다.

웅략천황(418~479)이 대화에서 쫓겨나서 여생을 마친 곳으로 고려된다.


청녕천황은 웅략천황이 죽자 웅략의 아들로 추정되는 조일랑朝日郞을 공격하였다. 웅략이 이름을 바꾸어 은거했던 이가伊賀의 청묘靑墓에서 싸워 죽였다.

조일랑의 후예가 [신찬성씨록]에서 낭자왕의 후예로 고려된다.

대가랑, 가랑성 등은 신라국 낭장왕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신찬성씨록] 大賀良 新羅國郎子王之後也     

[신찬성씨록] 賀良姓 新羅國郎子王之後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