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식 장군의 수수께끼
강이식 장군의 수수께끼
신채호 선생은 강이식 장군을 고구려 병마원수로서 임유관 전투를 승리한 분이라고 했고
그 후손인 강희안은 연원보서문에서, 강린은 국로추사라는 책에서 강이식 장군을 수나라 장수라고 하였다.
이에 그 내용을 점검하고 밝혀본다.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국적 판단(國籍判斷) 및 국로추사(菊露秋寫)에 대한 위서 판단(僞書判斷)
Daangoon(dr. Koo)
강린(姜璘)은 국로추사(菊露秋寫,1928)라는 책에서 강이식(姜以式)장군이 수양제(隋煬帝)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서 고구려(高句麗)를 침공(侵攻)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국로추사(菊露秋寫)는 위서(僞書)다.
특히 고구려(高句麗)에 악의적(惡意的)인 위서(僞書)다.
강린(姜璘)은 스스로 백제조선(百濟朝鮮) 왕대력(王代歷)에서, 광개토왕(廣開土王) 통치기 22년을 삭제하고 대신 고국양왕(故國壤王) 통치기 8년을 29년으로 확대하여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왜곡하였고,
역사적 지식(歷史的 知識)이 매우 부족하여 고구려유기(高句麗留記) 등 잡다한 위서(僞書)를 사실 판단(史實 判斷) 없이 인용(引用)하였다.
1.2에서 국로추사의 위서 내용, 인용서(引用書)의 위서 내용을 차례로 밝히고
3.에서 강이식(姜以式)의 국적을 고찰한다.
1. 강린(姜璘)의 역사(歷史) 위조(僞造)
① 광개토왕 즉위 및 통치기록 삭제 조작
391년 (辰斯王) 辛卯六年[羅三十五年 麗七年(故國壤王7年)] = 廣開土王 永樂元年
392년 壬辰七年[羅三十六年, 麗八年(故國壤王8年)] 三月麗王薨太子卽位是爲淡德王
393년 (阿莘王) 癸巳元年[羅三十七年麗九年(故國壤王9年)]
400년 庚子八年[羅四十四年麗十六年(故國壤王16年)]
402년 壬寅十年[羅四十六年麗十八年(故國壤王18年]
405년 乙巳十三年[羅三年麗二十一年(故國壤王21年)]
407년 (腆支王)丁未二年[羅五年麗二十三年(故國壤王23年)]
408년 戊申三年[羅六年麗二十四年(故國壤王24年)]
413년 癸丑八年[羅十一年麗二十九年(故國壤王29年)]冬十月麗王薨太子卽位是爲巨璉王
광개토왕(廣開土王)은 391년에 즉위하여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세웠고 재위 22년인 412년에 서거했다. 이는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그런데, 강린(姜璘)의 국로추사(菊露秋寫)에서는, 392년 고국양왕(故國壤王)이 서거하여 담덕왕(談德王)이 즉위했다고 적어놓고도, 왕대력은 계속 고국양왕(故國壤王)으로 기록했다.
그결과 광개토왕이 22년을 통치하고서 실제 서거한 412년을 413년으로 잘못 기록하면서 고국양왕(故國壤王)이 재위 29년인 413년에 서거했다고 왜곡(歪曲)했다.
광개토왕의 연호(年號) 영락(永樂)도 없다.
강린(姜璘)은 당시에 이미 공개된 광개토왕비문의 해석문(解析文)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고구려 왕대력(王代歷)에서 광개토왕을 지워버린 것이다.
② 동명왕(東明王), 광개토왕(廣開土王), 장수왕(長壽王)의 왕호(王號) 삭제(削除)
강린(姜璘)은 또한 동명왕(東明王)과 광개토왕(廣開土王), 장수왕(長壽王)의 세 분의 왕호(王號)를 삭제(削除)했다.
대신, 주몽왕(朱蒙王), 담덕왕(談德王), 거련왕(巨璉王)으로 기록했다.
(前37년) 甲申二十一年 高朱蒙嗣卒本扶餘王位 國號改稱高句麗
(前19년) 壬寅十三年[高句麗十九年]高句麗王朱蒙薨 太子類利立是爲琉璃王
(392년) 壬辰七年[羅三十六年麗八年] 麗王薨太子卽位是爲淡德王
(413년) 癸丑八年[羅十一年麗二十九年] 麗王薨太子卽位是爲巨璉王
세 분 이외의 모든 고구려 왕의 이름과 왕호는 다 기록했다.
이러한 ①왕대력(王代歷) 조작(造作)과 ②고구려 왕호(王號) 삭제(削除)는
강린(姜璘)의 고의적(故意的)인 역사 왜곡(歷史歪曲)이다.
③ 강린(姜麟)의 후연(後燕)에 대한 무지(無知)와 허위(虛位) 주장(主張)
枕流王 乙酉元年[羅二十九年麗元年]
○夏六月麗王出兵四萬伐遼東玄菟大破之虜男女萬
餘人而還[見遼東史] ○[按漢書本紀 燕王垂命 帶方王佐使鎭龍城 佐使聞 高句麗襲遼
東 遣司馬郝景將兵救此遼東 麗軍大破郝景軍禽男女萬餘人而去]
385년 6월, 고구려가 요동현도를 쳐서 남녀 만여인을 잡아왔다는 내용인데,
뒤에 해설에서 후연왕 모용수가 대방왕 모용좌를 용성에 진치게 했었는데, 좌사(佐使)가 고구려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마 학경을 보냈으나, 고구려가 학경군을 대파하고 남녀 1만을 잡아왔다고 주석했다,
후연 황제 모용수(慕容垂)의 대방왕은 모용좌(慕容佐)다.
이를 무지하게 좌사(佐使)라고 기록하고 있다.
강린(姜麟)이 살펴봤다는 한서본기(漢書本紀)는 이런 내용이 당연히 없다.
본래 기록은 진서본기(晉書本紀)도 아니고 진서재기(晉書載記)에 실려 있다.
강린(姜璘)은 한나라와 진나라 시대도 구분 못하고 한서본기(漢書本紀)를 살펴봤다고 허위(虛僞)로 주장했다.
2. 국로추사(菊露秋寫) 인용서(引用書)의 역사(歷史) 위변조(僞變造)
1) 고구려유기(高句麗留記)를 인용한 왜곡
강린(姜璘)이 인용했다는 고구려유기(高句麗留記)는 마치 고구려시대 기록으로 착각하게 하지만, 그 내용은 청나라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서 추정컨대 1900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645년 고구려유기(高句麗留記) 인용 기록으로 알수 있다.
아래는 안시성, 건안성을 왜곡한 고구려유기(高句麗留記)를 인용한 국로추서 부분이다.
645년 乙巳四年[羅十三年麗三年]
]○是時唐將張亮引兵過建安城高德出兵襲擊大破唐兵麗王大悅
謂高德曰願將軍出萬死之計以保社稷以慰殘民高德拜謝曰己在重任豈不盡力乎今
安巿在北地險兵强彼雖乘勝未可以歲月易破也建安在南兵疲粮小若犯敵兵則危在
朝暮矣假使太宗出於上計國之存亡未可知也出於下計唐之士卒不得還矣王問何謂
上計對曰塞安市之險據遼東之粟拒襄平之路守渾江之口先攻建安則國之存亡未可
易辦也何謂下計對曰守木底之險杜龍灣之津據蒼巖之口塞建安之路直攻安巿則唐
軍不得歸矣曰然則計將安出對曰太宗絶世之英雄然不慣地勢而恃衆侮弱必出下計
矣於是麗王大喜召諸將發城中老弱未傅者悉詣安市麗軍復大振堅壁固守數挑戰唐
兵終不出戰麗將使人辱之數日果如高德之言而太宗大怒恃勇輕進先攻安市將軍匿
其壯士但以老弱出戰佯爲不勝而走入城中唐兵乘勝逐之突入城內高德夾擊大破唐
兵斬首萬餘級乃復其十餘城據遼東之粟塞直城之險南拒石門嶺北守太子河以斷歸
路追至龍灣大破唐軍而盡坑殺之俘虜數萬矣[見留記]
위에 기록된 혼강(渾江)은 청나라(淸代) 때 이름이다. 과거에는 파저강(波猪江)이었다.
태자하(太子河)는 명나라(明代)때 이름이다. 과거에는 동량하(東梁河)이었다.
위 지명들은 안시성(安市城)을 압록강 북쪽의 봉황성(鳳凰城)으로 비정한 결과인데 이는 조선 후기 이계집(耳溪集, 1843)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고구려유기(高句麗留記)는 청나라 이후에 쓰여진 것이 확실하고, 대략 1900년대로 추정한다.
현재 안시성은 요하 동쪽의 해성시(海城市)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러나 요하 서쪽의 북진시(北鎭市)가 옳다. 당시 요하가 지금의 대릉하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유기(高句麗留記)를 인용한 역사 왜곡들
① 402년 阿莘王 壬寅十年[羅四十六年麗十八年] 九月麗王以阿飡高信爲將帥輕銳數萬北襲伐燕平州刺史慕容歸棄城奔 [見留記]
402년, 고국양왕18년, 9월에 고구려왕이 아찬 고신을 장수로 하여 빠른 수만군으로 북쪽을 쳐서 연나라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했는데,
⑴402년은 광개토왕(廣開土王)12년인데, 고국양왕(故國壤王)18년으로 왜곡했고,
⑵서(西)쪽을 쳤는데 북쪽을 쳤다고(北襲) 왜곡했고
⑶고구려(高句麗) 고신(高信)의 관직(官職)이 신라(新羅)의 아찬(阿飡)이라 했고,
⑷5월(五月)을 9월(九月)이라고 왜곡했다.
이는 아래 인용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자치통감(資治通鑑)으로 알 수 있다.
401년 三國史記 十一年 (廣開土王十一年) 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棄城走
402년 資治通鑑 卷一百十二 元興元年 五月 高句麗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棄城走
② 495년 乙亥十六年[羅十六年麗四年]秋八月麗王引兵伐濟圍雉壤城王請救於新羅羅王以達率德智爲忠武將軍帥衆五千援之大戰大破麗軍 [見留記]
495년에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을 공격하니 신라가 덕지장군을 보냈는데 신라장수에게 백제관직을 붙였다. 신라 장수 덕지(德智)는 백제 관직 달솔(達率)이 될 수 없다.
③ 591년 辛亥三十七年[羅十二年麗元年]十月麗王以溫達爲兵官都督將兵數萬進攻新羅阿且城羅王命阿飡異信出兵逆戰大破麗軍遂殺兵官溫達
○翌日將軍都督溫達引兵進攻連戰連勝乘勝長驅戰於竹嶺而見大敗爲敵所害也王聞之甚爲哀悼以禮葬之追贈大角干封安平君賜寀慰其家族矣[見留記]
고구려 온달장군(溫達將軍)이 아차성에서 신라병에게 죽었는데, 고구려왕이 추증하여 대각간(大角干), 안평군에 봉했다.
대각간(大角干)은 신라 최고 관직(新羅最高官職)이다.
④고구려유기(高句麗留記)를 인용한 역사 왜곡4
598년 戊午四十四年[麗八年]春麗王帥靺鞨之衆數萬伐遼營州總管韋沖出兵拒戰麗軍不利見敗引還矣隋帝聞之大怒以王諒王世績爲都元帥將水陸軍三十萬出屯於臨渝關會天連日大雨潦水漲溢糧道不繼軍皆飢乏又逢疫疾而進退兩難不知所爲矣是時周羅㬋周羅喉自東萊航海赴平壤城遇大風波多爲沈沒於是隋將不爲一戰而返師兩軍皆自死生還者不過數千矣麗王聞之遣使慰勞隋煬帝大悅厚禮稱謝請和親[見留記]
당시는 수문제(隋文帝)인데 수양제(隋煬帝)로 변신한 역사 왜곡이다.
역사(歷史)를 창작(創作)하면서 만들어진 역사 왜곡(歷史歪曲)들이다.
2) 요동사(遼東史)를 인용한 왜곡
①강이식(姜以式) 관련1
壬申十二年[羅三十三年麗二十二年]春正月隋煬帝使姜以式爲兵馬都元帥 勅左十
二軍幷出遼東玄菟[音都]右十二軍分出帶方襄平俱會平壤納軍百十三萬三千八百
人又餽輸者倍之車騎輜重亘於九百六十里而鳴鼓進兵天地震動矣時麗王以乙支文
德爲驃騎將軍堅壁固守不出隋師不得入屯陣久守不下楊廣[隋帝姓名]大怒親帥騎
兵四十隊步兵八十隊至遼東城南觀其形勢召責諸將曰公等尸位素餐今不極力久而
不決方欲斬之諸將皆驚懼失色矣楊廣乃留陣城西遂進兵麗軍堅守不下於是姜元帥
命左翊將軍來護兒遂進軍舳艫千里自浿水入于平壤未至六十里急擊麗軍大破之乘
勝欲徑入城副摠管周法尙遮說曰麗兵尙强未可以輕也願將軍第待後軍而俱進護兒
不聽簡其精銳四萬直入城下是時麗將文德伏奇兵於羅郭內空寺中但以老弱出戰欲
見疲獘乃佯戰佯走護兒逐入城中伏兵俱發急擊大破隋師護兒仰天嘆曰今乃甕中之
鼠陷阱之獸不可圖生此將奈何吾悔不聽法尙之言也麗兵大呼曰今不急降皆殺之護
兒帥衆皆詣降盡坑殺之時護兒踰城遁出麗兵知之急追不及矣於是護兒收餘散卒屯
於海浦終不敢復出焉楊廣以宇文述爲左翊將軍先鋒出陣于扶餘[卒本]右翊將軍宇
仲文進軍於樂浪左驍將荊元恒屯陣於遼東右驍將薛世雄進屯於沃阻連營四十里首
尾相繼鼓角振聲旌旗亘於千餘里次進後軍兵甲連續於八十餘里古今以來發兵出師
未曾有若是者也○二月楊廣帥姜元帥等至遼水[今遼河在遼東城西北]麗軍堅拒不
得濟隋帝命尙書宇文愷乃造浮橋三道橋短不及焉是時麗兵大至浮水接戰登高急擊
隋軍不得升岸而大敗數十萬卒皆溺死而遼水爲之不流耳於是隋合散衆皆會鴨綠水
西餘兵不過百萬餘糧不過百日矣○麗將文德欲覘其虛實乃遣使詣其營陣而詐稱降
服仲文知其奸計遂欲殺之麗使曰偏邦小將食盡兵罷今自詣降當憐而愛之厚賞重祿
可也奈何反欲殺之乎乃亡命出奔仲文使裨將追之不及矣文德見隋軍皆有飢色乃欲
益爲疲困七戰七走仲文笑曰今日乃知無足爲也遂直追渡薩水至平壤城一舍[舍三十
里]未及處依山屯陣文德夜發間使遺詩於隋元帥以式曰[詩曰神策究天文妙算窮地
理戰勝功旣高知足願云止東方五言詩自此始焉]公等若返師則必爲勸吾王入朝修謝
矣元帥以式謂諸將曰今士卒疲獘難復合戰且平壤地險兵强未可以歲月易破也我久
留此地觀此國之虛實察其山川之險易然後當還國更爲出師必爲立功矣願公等當先
爲班師撫養戰士以致國富兵强最爲上策矣楊廣聞而然之遂還軍於是文德選精銳三
萬伏於薩水上乃率奇兵四萬急逐之而四面鈔擊隋軍且戰且驅至薩水[今安州淸川
江]士卒半渡伏兵俱發急擊其後大破隋軍捕殺薛世雄斬首二萬餘級溺水死者不可勝
數於是隋將士卒風糜薄散棄其戰具兵甲而失魂奔遁楊廣遁至石城山下聞風聲鶴唳
見紅石山草木而大驚曰是何麗兵之多也從天降耶從地出乎豈如是迫逐耶倍日幷行
而急走相蹈死者太半一晝夜至于鴨綠凡四百五十里王仁恭來護兒等聞敗還皆引兵
退去惟衛文昇一陣獨得其全矣九軍三十萬五千兵渡遼而及返旆惟存二千七百人而
糧無一合兵無一械隋帝忿怒械繫文述等而還國自此麗强聞於天下焉○麗王還宮按
甲休兵鎭撫士卒召群臣論功行賞以乙支文德爲大功忠武將軍封興京俟賜食邑[見遼
東史]
위 기록은 살수대첩(薩水大捷) 때에 수양제(隋煬帝)가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수나라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 임명하여 24군을 지휘하게 했다는 역사창작소설(歷史創作小說)이다.
이전까지 원수(元帥)는 많았지만, 도원수(都元帥)는 아직 없었다.
도원수(都元帥)는 당나라 대종(代宗; 762~779) 때에 처음 나타난다. 따라서 수나라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창작(創作)이다.
즉 수나라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강이식(姜以式)은 위조(僞造)된 것이다.
또한 수나라에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 강이식(姜以式)이 존재하였다면, 수서(隋書)에 당연히 기록되었을 것이다. 역적(逆賊)이든 배신자(背信者)든 당시 사서(史書)에는 다 기록된다.
수-고구려(隋-高句麗) 전쟁 중에 전선(戰線)에서 고구려(高句麗)로 도망간 병부시랑(兵部侍郎) 곡사정(斛斯政)도 기록되었는데, 총사령관인 도원수(都元帥) 강이식(姜以式)이 존재했다면 그 기록에서 절대로 뺄 수 없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위 기록에서 수양제(隋煬帝)를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 양광(楊廣), 수제(隋帝), 양광(楊廣), 양광(楊廣), 수제(隋帝)라고 적고 있는데 역사 창작 과정이 참으로 난잡(亂雜)한 것이다.
또한 강이식(姜以式)은 강원수(姜元帥), 강원수(姜元帥), 원수이식(元帥以式), 원수이식(元帥以式) 등 역시 난잡(亂雜)하게 적고 있다.
특히 강원수(姜元帥)와 같은 성-관직(姓-官職) 호칭 용례(用例)는 고대(古代) 역사서(歷史書)에 찾아보기 어렵다. 보통 성(姓)을 처음에만 한번 쓰고 뒤에는 간략히 이름만 쓴다.
위 기록에서 고구려왕이 을지문덕(乙支文德)에게 내려준 작호인 흥경후(興京侯)도 역사왜곡이다. 청 태조(淸太祖)가 처음 건국했던 혁도아라성(赫图阿拉城)에서 나와 봉천(奉天)으로 천도하고서 1634년에 혁도아라성(赫图阿拉城)을 흥경(興京)이라 불렀다.
따라서 요동사(遼東史)는 1634년 이후에 만들어진 책이다.
② 강이식(姜以式) 관련2
618년 戊寅十八年[羅麗二十八年]九月麗王薨弟建武立是爲榮留王○唐高祖遣使說麗王曰今大王親臨區宇愛育黎元何事非君何使非民矣惟隋末大亂兵革未息民多散亡地多空虛願大王特加高恩請還俘虜隋人王許之乃還送數萬人然什一歸而其餘留之不去麗王讓責曰普天之下莫非王土率土之民莫非王臣奈何不欲去乎姜以式奏曰予本隋國兵馬都元帥豈欲事唐乎寧爲麗國之鬼不願唐主之臣祿因留不返焉[見遼東史]
즉 수나라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강이식(姜以式)은 위조(僞造)된 것이다.
수나라 장수도 아니었고 살수대첩 전후에 고구려에 잡혔다는 이야기도 없다.
따라서 뒤에 이어지는 당나라로 송환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창작(創作)이다.
3) 신라고지(新羅古志)를 인용한 왜곡
① 418년 戊午十三年[羅元年麗五年] 新羅佐平朴瑅上死於倭國 [見羅古志]
백제 관직 좌평(佐平)을 신라인 박제상(朴堤上)에게 붙여주고 있다.
신라인이 신라고지(新羅古志)에 이런 글을 남겼을 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신라고지(新羅古志)도 위서(僞書)다.
② 552년 壬申二十九年[羅十二年麗七年] 秋九月羅王北巡狩勒石紀功績
[今咸興黃草嶺上有新羅眞興王碑筆力勁剛奇怪 後人指本而爲寶] [見羅古志]
552년 9월 신라왕이 북쪽을 순방하여 늑석기공을 하여 석비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황초령 진흥왕비가 있어 보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552년은 아직 신라 영토 확장이 안되었고, 순수비가 세워지기 전이다.
북한산 순수비는 555년 이후이고, 창녕비는 561년,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568년에 세워졌다.
③ 562년 壬午八年[羅二十二年麗十六年]九月 羅王滅大伽倻[任那日本府]爲郡
帥精銳五千急擊長驅那兵敗走遂入領栴陣門建白旗城中驚懼皆詣降於是斯夫引兵逐北遂殺那王 [見羅古志]
대가야(大伽倻)에 대해서 임나병(任那兵), 임나왕(任那王)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임나병을 뒤쫓아가 전진문(栴陣門)에 백기를 걸도록 명령했다?고 이상하게 기록했다.
본래는 사다함(斯多含)이 오천기를 지휘하여(領) 가야성(伽耶城)의 전단문(栴檀門)으로 들어가 (가야성(伽耶城)의 항복을 의미하는) 백기(白旗)를 달았다는 삼국사기 기록인데,
<斯多含>領五千騎先馳入<栴檀門>立白旗 / 三國史記
본래 문구(文句)에 대한 이해 부족(理解不足)으로, 단(檀)은 진(陣)이 되고, 령(領)이 앞뒤가 바뀌어서 왜곡된 것이다. 명령의 대상이 군사가 아닌 진문(陣門)이 되었다.
領五千騎 ---> 領栴陣門
4) 동사(東史)를 인용한 왜곡
① 古爾王 甲辰五十年[羅二十三年麗十四年]二月王命王仁論語七卷千字一冊送于日本倭君[見東史]
서기 284년 고이왕(古爾王)이 왕인(王仁)에게 명하여 논어7권과 천자문을 일본 왜왕에게 보냈다는 역사 왜곡이다.
일본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2갑자 이상 상향 조작되었는데 그것을 인용한 것이다.
실제는 375년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아지길사(阿知吉師)를 보냈고, 왜국의 추가 요청으로 근구수왕(近仇首王)이 377년에 왕인(王仁)을 보냈다.
고사기(古事記)에서 응신천황(應神天皇) 때에, 백제왕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아지길사(阿知吉師)를 먼저 보냈고, 또 현인(賢人)을 보내달라고 해서 왕인(王仁)을 보냈다.
亦百濟國主照古王、以牡馬壹疋・牝馬壹疋、付阿知吉師以貢上。
此阿知吉師者、阿直史等之祖。亦貢上横刀及大鏡。
又科賜百濟國「若有賢人者、貢上。」故受命以貢上人・名和邇吉師(=王仁)/ 古事記 應神記
3. 강이식(姜以式) 기록(記錄) 검토(檢討)
강이식에 관한 여러 기록들중
1) 진주강씨 연원보, 2) 대동운보군옥 3) 을축년보 4) 진산장씨문집장갈 5) 진산세감 6) 광동강씨보를 차례로 검토한다.
1) 진주강씨(晉州姜氏) 연원보(淵源譜)
강이식(姜以式)은 강희안(姜希顏; 1419~1464)의 진주강씨(晉州姜氏) 연원보(淵源譜) 서문(序文)에 처음 나오는 이름이다.
강희안(姜希顏; 1419~1464)은
염제신농(炎帝神農)이 강씨(姜氏) 원조라 하고,
주대(周代)의 강태공(姜太公)으로 이어져서
한대(漢代)의 강경(姜冏)이 천수(天水)를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후 수대(隋代)에 고구려가 속국으로 조례에 참여하지 않아서(朝禮有闕)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는데(興師征討), 강이식(姜以式)이 원수(元帥)였으나 죽었다고 하였다. (諱以式 爲元帥 而沒)
뒤이어 손자 강행본(姜行本)이 이적(李勣), 설인귀(薛仁貴)와 함께 당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에서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자, (그곳에서) 진무(鎭撫)하였고, 자손들이 대대로 총병(總兵)이 되었다.
조례유궐(朝禮有闕)은 수나라 조정의 조회(朝會)에 고구려왕이 궐석(闕席)하였다는 것이 명분인데. 이는 수양제 기록에 가깝다.
“와서 인사하지 않으면 계민을 시켜 너의 땅에 가도록 하겠다.”
607년. 苟或不朝 將帥啓民 往巡彼土 / 삼국사기 영양왕 18년
이래서 강희안(姜希顏)은 강이식을 612년 살수대첩(薩水大捷) 때의 수(隋)나라 원수(元帥)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선대가 한(漢)나라 천수군(天水郡)의 강씨(姜氏)이고, 뒤에 손자가 당나라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장수 강행본(姜行本)이니 그 중간에 위치한 강이식(姜以式)을 수나라 사람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신채호(申采浩)가 서곽잡록(西郭雜錄)에서 보았다면서, 강이식(姜以式)을 598년 임유관전투(臨楡關戰鬪)의 고구려 병마원수(兵馬元帥)라고 주장했다.
강희안(姜希顏)과 상충(相衝)되는 주장을 한 것이다.
여기서 강이식의 손자 강행본(姜行本)을 살펴본다.
625년에 당(唐)나라 수부랑중(水部郎中)을 지내고, 644년에 당태종의 명을 받아 행군총관(行軍總管)이 되어 유주(幽州) 안라산(安羅山)으로 갔던 천수강씨(天水 姜氏) 강행본(姜行本)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나온다.
강희안(姜希顏)은 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기록된 강행본(姜行本)을 강이식(姜以式)의 손자 강행본(姜行本)과 동일인(同一人)으로 오해(誤解)한 것이다.
그런데, 이 천수강씨(天水 姜氏) 강행본(姜行本)은 645년경에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당태종(唐太宗)을 수행하다가, 고구려군(高句麗軍)에게 화살을 맞아 즉사하였다.
在隨太宗行軍途中, 姜行本遇到高麗軍冷箭射擊, 當卽毙命/ 中華姜姓源流與太公文化硏究 81p.
또한 이 강행본(姜行本)은 부친이 강모(姜謩)이고, 조부는 강경(姜景)이며 따라서 고구려 강이식(姜以式)의 손자가 아니다.
따라서 668년, 고구려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평양(平壤)에 와서 진무(鎭撫)한 강이식(姜以式)의 손자 강행본(姜行本)은 645년에 전사한, 강경(姜景)의 손자 강행본(姜行本)과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당시 자치통감에 행본(行本)이라는 이름이 각 성씨별로 유행했었다.
강이식의 손자 강행본(姜行本)도 역시 당나라 장수(唐將)가 되어 668년에 고구려 안동도호부에 진무(鎭撫)하러 왔는데,
이는 추정하건대, 666년 9월 연남생(淵男生)의 당나라 투항 때에 따라가서
667년, 연남생(淵男生)이 당나라 요동도독겸 평양도안무대사(遼東都督 兼 平壤道安撫大使)가 되었을 때에,
강이식(姜以式)의 손자 강행본(姜行本)도 평양(平壤)에 진주해 와서, 진무(鎭撫)하고 대대로 총병(摠兵)으로 세거(世居)한 것으로 추정된다.
계속 고구려 땅에 남은 것은 오로지 강이식(姜以式)과 손자 강행본(姜行本)이 본래 고구려인(高句麗人)이고, 중국(中國)의 천수 강씨(天水姜氏)가 아니기 때문이다.
천수 강씨(天水姜氏)라면, 이국(異國) 평양(平壤)에 대대로 세거(世居)하지 않고, 일찍이 고향(故鄕)으로 돌아갔다.
강이식(姜以式)의 묘(墓)가 고대 살수(薩水)로 고려되는 혼하변(渾河邊)의 고려영자촌(高麗營子村)에 있으므로,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인(高句麗人)이 틀림없다.
다음은 대순회보에 적혀 있는 강이식묘(姜以式墓) 기록이다.
강이식의 묘가 있다고 알려진 마을은 ‘중국 요녕성 무순시 장당향 고려영자촌 원수림’인데, 고려영이란 고구려 군영이라는 뜻이고, 현재 ‘강이식의 묘소는 중국에 의해 묘비가 파괴되는 등 심하게 훼손되어 누구의 묘인지 확인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1930년 강씨 문중에서 그곳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묘비에 ‘고구려병마원수강공지총(高句麗兵馬元帥姜公之塚)’이라고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족보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고, 또한 일제강점기 때 그곳의 보장(군수)이었던 강보환(姜寶煥)이 그 묘소가 강씨의 시조묘라 하여 극진히 보살폈다고 한다.
또한 후대에 강감찬(姜邯贊)을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으로 작호(爵號)했지만, 실제 천수현(天水縣)의 강씨(姜氏) 후손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왜냐하면 한국(韓國)의 진주강씨(晉州姜氏) 남성 유전자(男性遺傳子)는 한국인을 대표하는 토착 유전자인 O1b2 타입(한국인의 20%)이고,
강태공(姜太公)의 후예는 O2a1 타입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다르다.
또한 진주강씨가 한국 성씨 순위 6위에, 무려 117만 인구를 구성하는 이유도 토착 유전자라서 가능하다. 한국성씨 순위 20위권에 드는 성씨는 대략 토착유전자다.
강희안의 서문에서 강이식의 후예인 강사진(姜思進)이 고려에서 무공(武功)으로 진양(晉陽)에 봉해졌다고 했고, 그후 강씨가 남강(南江)에서 번성하였다고 했다.
왕건(王建)의 나주(羅州) 점령(占領) 때에, 강사진(姜思進) 선대(先代) 강진(姜縉)이 협력하여 고려조정(高麗朝庭)에 진출하고 강사진(姜思進)이 진주(晉州)에 봉해진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진주(晉州)를 신라 신문왕 때 처음으로 진주(晉州)라고 불렀었다.
즉 고려 이전부터 진주의 토착 호족으로 강씨가 있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서기 400년, 광개토왕의 신라 구원 때에, 고구려군이 임나가라(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의 항복을 받고, 안라인(安羅人) 군사를 동원하여 술병(戌兵)을 시켰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求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盡○(=更)隋來安羅人戌兵○○○○○其○○○○○○○言○○○○○○○○○○○
○○○○○○○○○○辭○○○○○○○○○○○○潰○○○○安羅人戌兵/廣開土王碑文
광개토왕 비문에는 서기 400년조에 안라인 술병(安羅人戌兵)이 세 번 나오고, 특히
두 번째, 수래안라인술병(隋來安羅人戌兵)은 안라인(安羅人)이 고구려에 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함안(咸安)의 안라(安羅)와 진주(晉州)는 서로 이웃하여 있으므로 안라가야(安羅加耶)에 진주(晉州) 강씨(姜氏)가 뒷받침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 진주 강씨가 안라인(安羅人) 장수(將帥)로서 고구려로 들어가서, 그 후예인 강이식(姜以式)이 고구려 장수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신채호의 추정과 같이 598년에 고구려(高句麗)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참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 강씨와 강태공의 후예인 천수 강씨(天水姜氏)와의 연관은 강희안(姜希顏)의 창작일 수 있다. 도시조(都始祖)인 강이식(姜以式)을 수나라 장수로 단정해버린 것처럼 강희안(姜希顏)도 실수할 수 있다. 똑같은 실수를 강린(姜麟)도 되풀이한 것이다.
만약, 강희안(姜希顏)이 고려영자촌(高麗營子村)의 강이식묘(姜以式墓)를 찾아가 볼 수 있었다면, 연원보(淵源譜) 서문(序文)은 달리 쓰여졌을 것이다.
2) 대동운보군옥(大東韻府群玉, 1589)
대동운부군옥에서는 진주(晉州)조에서,
진주; 고구려때 강이식이 병마원수로서 수나라군대를 막게 하였다고 기록했다.
晉州 高句麗時 姜以式爲 兵馬元帥 以禦隋師
또한 금주(衿州)조에서 강여청(姜餘淸)이 신라로부터 와서 살았다고 하였다.
강감찬(姜邯贊) 장군은 강여청의 오대손이라고 하였다.
姜餘淸 自新羅來 居始興郡 卽今之衿川,,,姜邯贊, 餘淸之 五代孫
3) 숙종 을축년보(肅宗乙丑年譜, 1685, 姜錫圭)
을축년보(肅宗乙丑年譜, 1685)에는 대동운부군옥의 고구려 장수 기록과, 강희안의 수나라 장수 기록을 모두 실었다.
시조 강이식은 수양제가 고구려에 쳐들어올 때에 병마원수(兵馬元帥)로서 수나라 군대(隋師)를 막았다.
혹은, 수나라 원수(隋元帥)였으나, 살수에 이르러서 수나라장수들이 어지러워지니 머물러서 돌아가지 않았다.
隋煬帝 伐 高句麗時 爲禦隋師 或云 以隋元帥 至薩水而知 隋將亂仍留不返
4) 진산강씨문집장갈(晉山姜氏文集狀碣)
진산강씨문집장갈(晉山姜氏文集狀碣)에 실린 취죽공 강극성(姜克誠;1526~1576)의 행장(醉竹公行狀)을 보면, 그 현손(玄孫)인 강석규(姜錫圭,1628~1695)가 기록했는데, 아래와 같다.
진산강씨가 강이식에서 비롯되었고, 수양제가 동정할 때에, 고구려도원수였다,
晉山之姜 自 諱以式 始, 隋煬帝 東征時 爲 高句麗 都元帥 後孫...
그러나 한편으로 강석규(姜錫圭,1628~1695)는 위의 숙종을축연보(肅宗乙丑年譜, 1685)에서 수나라원수(隋元帥)였을 수도 있다는 기록을 족보(族譜)에 남겼다.
강극성(姜克誠;1526~1576)의 사망년도로 보아서 강석규(姜錫圭)는 먼저 고구려도원수(高句麗都元帥)를 지지하다가 문중(門中)의 일부 의견(意見)을 버리지 못하고, 혹(惑)으로 붙여놓은 것 같다.
5) 진산세감(晉山世鑑,1904)
진산세감(晉山世鑑)에 의하면 강이식은 661년 이전에 고구려 원수(元帥)였다.
강이식(姜以式)은 신라 무열왕(재위;654~661) 때의 사람으로,
무열왕이 고구려를 치려고 할 때에,
그나라 사람들이 강이식을 원수로 추천하니 무적이었다.
姜以式 武烈王初年人也...
武烈王 欲伐東明而難, 其人朝廷 以公 爲 知兵 咸薦 之乃 爲 元帥 所向 無敵
그러나, 598년 임유관(臨楡關) 전투와 연관지으면, 강이식(姜以式)을 대략 560년경 출생으로 고려하여서, 654년에는 90세를 훌쩍 넘는다. 따라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이다.
물론 무열왕 때에, 고구려의 전설로 신라에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을 수 있다.
6) 중국 광동 강씨보(中國廣東姜氏譜)
중국 광동 강씨보(中國廣東姜氏譜)에 아랫글이 있다고 대순회보(大順會報)에서 전한다. 대순회(大順會)는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을 모신다.
공이 태조를 보좌하다가 후황제가 찬탈하니 재야로 물러났다.
公佐太祖以定天下後帝簒位公以退野
그러나 현재로서 광동강씨보의 자세한 원문을 알 수가 없어서
과연 주인공인 공(公)이 강이식(姜以式)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고
난데없는 태조(太祖)는 과연 고조(高祖)라고 했던 수문제(隋文帝)인지
후제(後帝)는 수양제(隋煬帝)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족보를 허위로 만들면서 창작 왜곡한 것처럼 문장이 난잡한 것이다.
게다가 공이, 아마도 604년에 은퇴했다고까지 했다.
수나라 장수로서 고구려 전에 수양제와 함께 참전할 수도 없었다는 기록이다.
즉 동명이인(同名異人)일 가능성도 있고, 그냥 창작일 수도 있다.
광동강씨(廣東姜氏)는 명나라 때에 장주(漳州)에서 강세량(姜世良)으로 비롯된다.
광동강씨(廣東姜氏) 남성 유전자 DNA는 아직 보고된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