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반대왕 아들 효안천황 대물주신 되다
왜여왕 일여의 사후에 일여의 숙부인 효안천황이 일본을 다스렸다. 그러나 그는 숭신천황이 된 부여왕 의려의 침략을 당하여서, 288년에 일본 왕권을 빼앗기고 삼륜산에 들어가 대물주신이 되어 숨어살았다.
효안천황의 후비가 된 야마토모모소는 백성들이 추앙하여 그녀가 죽자 저묘를 백성들이 만들어 주었다.
제 6세 천황으로 기록된 효안천황孝安天皇(222~298)은 오오야마토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도大倭帶日子國押人命라고 했는데 무로室의 아기쯔시마궁秋津嶋宮에 있었다.
효안천황은 사반대왕인 효소천황의 아들이며 아메노오시타라시히코天押帶日子命(220~258)의 동생이다.
[고사기]의 저자 야스마로安萬侶는 대帶를 타라시多羅斯로 읽으라고 했다. [일본서기]는 대帶를 족足으로 바꾸었는데 역시 같은 뜻이고 다리시는 우리말 다리에 명사형 어미 이를 붙인 것에 해당한다. 실제로 경행천황은 오호타라시大足라고 했는데 그의 키는 1장2촌, 정강이는 4척1촌이라고 했다.
한편 [고사기/숭신천황기]에서 숭신천황에게 일본이 굴복 당한 후, 숭신천황이 허가하여,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미와산신三輪山神)(222~298)를 제사 모시게 된 오호타타네코意富多多泥古가 등장한다. [일본서기]에서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의 아들 오다다네코大田田根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타타니多多泥, 田田根가 바로 타라시帶 즉, 多羅斯와 관련된다.
신무천황비(219~273)의 이름이 후토타타라-이스케요리富登多多良伊須須枝比賣라고 했고, 신무천황비의 어머니도 세야다타라勢夜陀多良라고 했는데 타타라는 크다는 뜻이다. 타타라가 타라시의 어원으로 보인다.
효안천황이 바로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이다. 그의 궁宮이 있던 곳의 지명이 무로室인 것이 물物의 연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호타타네코意富多多泥古는 오오모노누시大物主神인 효안천황 오오야마토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도大倭帶日子國押人命의 아들인 것이다.
283년 개화천황(244~283)의 사후에 효소천황의 아들이자 개화천황의 숙부인 효안천황(222~298)이 즉위하였는데, 중국 요녕성遼寧省 요서遼西에 있던 부여夫餘에서 285년 이후에 일본으로 새로 도래한 의려왕依慮王, 즉 효령천황孝靈天皇(261~316)의 침략을 받았다.
효안천황은 미와산三輪山의 전설에 의하면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이라고 하였고, 이때 미와산의 이쿠타마요리히메活玉依媛(235~318)와 대물주신이 만나서 오호타타네코意富多多泥古가 태어났다.
이쿠타마요리히메活玉依媛의 아버지는 스에쯔미미陶津耳로서 세야다타라勢夜陀多良의 아버지와 같다.
즉 이쿠타마요리히메活玉依媛는 신무천황비 이스케요리(219~273)에게 나이어린 이모가 되며 세야다타라의 동생이다. 세야다타라는 언니로서 사대주신 효소천황과 결혼하였고 기십년 뒤에 그 동생 이쿠타마요리히메는 효소천황의 아들인 대물주신 효안천황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오사카大阪의 대형고분인 저묘箸墓의 주인이 되었던 야마토모모소히메夜麻登母母曾毗賣命(235~318)은 기록 연대로 보아서 숭신천황이 서거한 318년에 서거한 것이 타당한데, 84세를 누렸으니 235년생이 된다.
그녀가 대물주신의 처였다고 하니, 효안천황(222~298)의 부인이었고, 결국 삼륜산 이쿠타마요리히메活玉依姬(235~318)가 야마토모모소히메인 것이다.
이스케요리히메伊須氣余理比賣(219~273)를 신무천황이 취할 때에 7명의 소녀를 세워놓고 선을 보았는데, 이스케요리히메가 결혼 당시에 신궁의 7신녀 중에서 대표 여제사장이었을 수 있다.
이스케요리히메가 황비가 된 후에 그 신궁에는 나이어린 야마토모모소히메(235~318)가 여제사장을 이어받았을 것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부여인 의려왕, 즉 효령천황孝靈天皇(261~316)의 침공으로 효안천황은 야마토모모소와 함께 미와산三輪山으로 피신하였고,
구수대왕의 아들인 의덕천황 동생 시키즈히코의 손녀인 야마토아례히倭國阿禮比賣命(266~314)가 새로 여제사장이 되어서 침략자인 효령천황의 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효령천황은 전왕 효안천황의 황후인 오시카히메(235~288)를 죽였을 것이고, 후비인 야마토모모소(235~318)도 동시에 죽이려고 하였으나 야마토모모소는 살아남았다.
효령천황의 아들 의라왕依羅王 숭신천황崇神天皇(277~318)은 민심을 수습하려고 효안천황의 아들을 찾아서 대물주신을 제사지내도록 하고, 효안천황의 부인인 야마토모모소히메도 신궁에 살도록 하였는데 318년에 84세로 죽었다. 숭신천황 때에 그녀가 죽자 백성들이 몰래몰래 돌을 쌓아 만들었고, 그래서 귀신이 만들었다고 했으며, 젖가락으로 찔렸었기 때문에 저묘箸墓라고 불러왔는데 대형 전방후원 고분이다.
효령천황의 비가 된 여제사장 야마토아례히倭國阿禮比賣命(266~314)는 구수대왕의 아들인 시키쯔히고師木津日子命(198~248)의 아들 와찌즈미和知都美命(235~288)의 딸이라고 했다.
그런데 야마토모모소夜麻登登母母曾毗賣命(235~318)는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라던 효안천황의 처妻였고, [고사기] 등의 왜곡된 기록처럼 자기보다 어린 야마토아례히(266~314)의 딸이 될 수는 없다.
여제사장女祭祀長을 재왕齋王이라고도 하는데, 왜여왕의 통치권을 빼앗고 단지 제사권만을 남긴 것이 재왕齋王으로 고려된다.
256년부터 통치한 왜여왕 일여(244~283), 즉 개화천황의 사후에, 283년부터 재왕은 야마토모모소夜麻登登母母曾毗賣命(235~318)가 되었다가 효령천황에게 제거되고 대신 288년부터 야마토아례히倭國阿禮比賣命(266~314)가 재왕이 되었고 314년 뒤에는 야마토히메倭比賣命(277~366)로 재왕이 이어진 것으로 고려된다.
야마토아례히倭國阿禮比賣命의 부친은, 의덕천황의 동생인 시키즈히코師木津日子命(198~248)의 아들 와치츠미和知都美(235~288)인데, 와치츠미의 부인이자 야마토아례히 모친은 기록이 따로 없는 형편이지만 왜여왕 일여, 즉 개화천황일 것으로 고려된다.
개화천황 일여의 남편으로 추정된 히코쿠니오케즈日子國意祁都가 와니신丸邇臣(=和爾)의 선조인데 와찌쯔미和知都美(235~288)와 동일인물이 된다.
야마토히메倭比賣命(277~366)은 가야의 선견先見 왕자인 수인천황垂仁天皇(240~310)과 히바스히메氷羽州比賣命(252~293)의 딸이었다.
[주] 효안천황의 이름은 오시히도押人였는데, “오시”는 도래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 오시다와 관련된다.
히도人는 히飛와 도鳥로 각각 나누어 발음하면 우리말로 비조飛鳥로 추정된다. 백제 왕가로서 일본에 뿌리내린 비조鼻祖라고도 할 수 있다. 백제계인 오시히토, 즉 왜비조倭鼻祖왕으로부터 뒷날 꽃피운 아스까문화飛鳥文化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을 알 수가 있다.
[주] 한편 그의 궁성은 가쓰라기葛城의 무로室의 아기쓰시마秋津島궁이었다.
아기쓰시마秋津都는 일본 열도의 형상을 의미하는 “꼬리를 문 잠자리의 섬”라는 것으로서 아기쓰蜻蛉(잠자리)라고도 한다. 비조飛鳥는 비충(飛蟲; 나르는 것)과 의미가 상통하여, 비충으로부터 아기쓰蜻蛉, 잠자리 섬이 유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