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일본사

사반대왕 아들 국견 효원천황

단군천사짱 2006. 1. 4. 22:39
 

사반대왕의 아들 효원천황은 신무천황을 피하여 가야에 갔다가 거등왕의 딸과 결혼하고 돌아온다.

효원천황의 여동생은 거등왕의 아들 천일창과 결혼하였는데 가야로부터 일본에 도망쳐왔고 이를 쫓아 일본에 온 천일창에 의해서 효원천황 남매가 죽는다.

 

제 8세 천황으로 기록된 효원천황孝元天皇(228~273)의 이름은 쿠루玖琉이며 그의 궁성 이름은 사까이하라堺原 궁이다.

한자漢字식 이름 견을 썼고, 견牽(끌 견)의 우리말 훈인 “끌”을 연음하여 읽은 것이다. 즉 끌로부터 꾸루가 도출되어 꾸루왕이 된 것이다. 

는 사까이라고 읽으니 사천沙川, 사가와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는 사반대왕, 사대주신, 효소천황의 아들 사본왕沙本王이며 그 여동생은 사하지히메沙波遲比賣(249~272)로서 가야 땅에 아메노히호코天日槍인 수인천황垂仁天皇(240~310)에게 시집갔다가, 다시 친정으로 돌아와서 효소천황궁에서 자살하였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실린 천일창天日槍(아메노히호코)의 신화에는 신라에서 소를 끌고[牽] 가는 사람을 협박하여서, 천일창이 아리따운 여자 아카루히메阿加流比賣(=赤玉女)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 여자가 일본으로 돌아가니 일본에 따라와서 찾게 된다.

즉, 수인천황-천일창은 국견천황에게서 아카루히메赤玉女를 얻은 것이다.

이 아카루히메가 곧 효원천황의 동생 사하지히메沙波遲比賣(249~272)다.

효원천황은 화가 난 수인천황에 의해 이즈모出雲로 쫓겨갔다가 사하지히메가 죽은 다음해에 죽은 것이다.

사본왕 효원천황(228~273)은 우쯔시코內色許命의 여동생(실제는 윗누이다.) 우쯔시코메內色許賣命(223~266)와 결혼하고, 개화천황開化天皇을 낳았는데 개화천황은 왜여왕 일여壹與(244~283)다.

[일본서기/수인천황기]에서 아메노히호코天日槍는 스스로 우시끼아리시끼간기于斯岐阿利叱干岐라고 하였는데 이를 [효원천황기]에서는 우쯔시코內色許命라고 적은 것이다.

한편 천일창과 우쯔시코메內色許賣命(223~266)는 가야 거등왕巨登王의 왕자와 공주이고 이 가야공주 우쯔시코메와 효원천황 사본왕의 딸이 일여壹與다.


김해의 김수로왕 신전인 숭선전崇善殿에서 나온 [김씨왕세계]에 의하면 “선견先見이라는 이름의 왕자가 신녀神女와 더불어 구름을 타고 떠났기 때문에 거등왕居登王(재위 199~259)이 강에 있는 돌섬의 바위에 올라가 선견왕자를 부르는 그림을 새겼다. 이 때문에 속전俗傳하기를 초선대招仙臺라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효원천황은 가야에 사절로 가서, 혹은 신무천황을 피하여 가야에 망명가서, 거등왕의 딸인 우쯔시코메內色許賣命와 결혼하여서 일본으로 데려오고, 훗날에는 가야의 선견왕(240~310)에게 여동생 사하지히메沙波遲比賣를 주어서 이중의 국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250년대 초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여동생이 가야의 선견왕자와 결별하여 일본으로 돌아오니, 선견왕자가 일본으로 이 여동생, 즉 신녀를 쫓아왔는데 바로 아메노히호코天日槍인 수인천황垂仁天皇이 그 가야국 선견왕자다.


효원천황은 또 수인천황인 우쯔시코內色許命의 딸인 이카가시코메伊迦賀色許賣命(251~306)와도 결혼하였다.

효원천황과 이카가시코메의 아들인 히코후쯔오시노마코토比古布都押之信命(268~314)의 아들이 우마시우찌노스쿠네 미사내숙녜味師內宿禰(295~318)고 그의 아들이 장수한 것으로 알려진 경행천황, 성무천황, 인덕천황의 신하 타케우찌노스쿠네建內宿禰(316~431)다.


효원천황이 아오타마靑玉의 딸인 하니야스히메波迩夜須毘賣命(226~279)과 결혼하여서 타케하니야스建波迩夜須毘古(248~287)를 낳았다. 그는 부여에서 온 의려왕인 효령천황과 맞서다가 287년에 죽었다. [고사기]에서는 숭신천황에게 반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연대가 효령천황이다.


효원천황은 실제로 천황의 위치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나, 그의 딸 일여가 일찌감치 왜여왕이 되었으므로 천황으로 추증된 것이다. 그의 능은 왜여왕 일여에 의해 세워진 전방후원 고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