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로대왕의 죽음과 왜무왕의 즉위
475년 고구려 장수대왕의 침입으로 개로대왕이 참살당하고 백제는 혼란에 빠져든다.
개로대왕의 동생 문주대왕이 즉위했으나 3년만에 암살당하고 문주대왕의 아들 삼근왕이 즉위했으나 폐위되었다.
개로대왕의 동생 청녕천황은 개로대왕의 아들 무녕대왕을 왜무왕으로 봉하고 시변인로왕의 손자 억계왕자를 백제왕으로 봉했는데 백제 모도대왕이다.
청녕천황과 무녕대왕은 바다 건너 고구려 공격에 나섰는데
이때 억계왕자 모도대왕의 동생 홍계가 왜왕위를 찬탈하여 현종천황이 된다.
475년 9월에 고구려 장수대왕長壽大王은 3만의 병력으로 남하하여 476년 정월에는 백제의 수도인 개로대왕의 대산한성과 한산성을 함락시키고,
개로대왕을 아차성阿且城에 끌고가서 참살하였다. 이 아차성은 서울의 아차산성峨嵯山城으로 알려져 왔으나 평안북도 선천군의 읍성이던 아단성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는 고구려가 백제 북성을 쳐서 7일만에 함락시키고 이어 개로대왕이 있던 남성을 공격하여 서쪽으로즉 쌍현성으로 도망치던 개로대왕을 죽였다고 하였다.
[일본서기]에서 웅략천황 20년조에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백제 개로대왕의 을묘년475년에 맥貊, 즉 고구려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평성平城 청룡산성靑龍山城=대산한성大山漢城)을 치고,
칠일만에 왕성王城(=평양平壤 안학궁安鶴宮)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위례성까지 잃었다고 하였다.
또한 백제의 국왕과 왕비, 왕자들이 고구려적에게 떼죽음을 당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북성, 즉 대성은 평성 청룡산성이다. 북한산성北漢山城, 대산한성大山漢城 또는 사성蛇城이라고도 하였다.
사성蛇城이 청룡성靑龍城이 되는 것은 시대의 변화다.
개로대왕의 사후에 그의 동생인 문주대왕文周大王(~477)이 충청남도 금강 웅진성에 도읍하였다. 문주대왕이 개로대왕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와 달리 [일본서기]에는 개로대왕의 동생이라고 하였는데 동생이 맞다.
477년 문주대왕이 공주에서 백제를 재건하는데 청녕천황이 일본으로부터 찾아갔다. 문주대왕은 청녕천황을 내신좌평으로 임명했으나 받지 않고 석달만에 다시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478년 9월 문주대왕은 병관좌평 해구解仇에게 암살당했다.
뒤이어 문주대왕의 13살 짜리 아들 삼근대왕三斤大王이 즉위하였다.
477년, 청녕천황이 백제로 떠날 때에 개로대왕의 아들인 무녕대왕을 왜무왕倭武王으로 즉위시켰다.
[고사기 하권]에는 천황 숫자를 19명이라고 하고 18명만 적었으니 한 명을 기록하지 않았는데, 대개 반풍황녀로 추정해왔다.
그러나 빠진 것은 무녕대왕武寧大王(461~523)이며 왜무왕倭武王인데 [고사기]를 전사傳寫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없애버린 것이다.
왜무왕은 28세의 시마왕島王인 백제 무녕대왕이다.
[일본서기]에서 일본에서 태어난 개로대왕의 아들인 무녕대왕은 도군島君, 즉 도島왕자라고 하였다. 도島는 일본말로 시마斯麻라고 발음하는데 무녕대왕릉 지석에 기록된 이름이 역시 시마斯麻다.
왜무왕은 당시 478년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475년에 있었던 개로대왕과 왕자들의 죽음을 부형父兄의 죽음으로 기록하였다.
그 국서에서 왜제왕을 부왕이라 하면서 동시에 참살당한 개로대왕을 부왕이라고 부른 그 국서에 의해서 왜무왕이 시마왕, 즉 백제 무녕대왕인 것이 증명된다.
[宋書] 臣亡考 濟 , 奄喪 父兄 , 申父兄之志..
왜무왕은 이 국서로서 자신의 왜왕 즉위를 알리면서 동시에 왜왕과 백제왕의 겸왕을 선언하였다. [宋書] 自稱使持節 都督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七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하지만 송나라는 무녕대왕에게 백제를 제외한 6국제군사겸 안동대장군 왜국왕으로 책봉하였다.
무녕대왕武寧大王(461~523)은 고구려계 윤공천황의 증손녀인 난파소야왕難波小野王(461~498)과 사랑에 빠졌다.
[고사기/웅략천황기]에 나오는 천어가天語歌 등 시가詩歌 6편이 무녕대왕의 이야기다. 시 한편에서는 오도히메(袁杵比賣=小姬=웅략천황의 손녀)와 술래잡기를 하였고, 또 한편에서는 미에三重(웅략천황이 은거한 곳)의 공녀가 무녕대왕을 축수하는 시가였고, 또한편은 황후가 그녀에게 무녕대왕을 위해서 술을 올리라는 것이고, 또 무녕대왕이 그녀에게 술병을 꼭 잡으라는 시가도 있고 마지막에는 그녀가 무녕대왕을 위해 헌신한다는 축사였다.
479년 청녕천황은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해 왜무왕의 왜군을 동원하였다.
백제대왕으로는 인현천황仁賢天皇(447~498) 억계왕億計王을 임명하였다.
[청녕천황기]에서 청녕천황은 억계왕을 태자로 세웠다고 하였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 건원 2년, 480년에 백제왕으로 모도왕牟都王을 책명하였고, 또한 영명8년, 490년에 그 손자 모대왕牟大王을 백제왕으로 책명하였다.
즉 백제 모도왕牟都王이 동성대왕東城大王이며 억계왕 인현천황仁賢天皇이다.
[일본서기/웅략천황기] 23년, 즉 479년경에 말다왕末多王을 백제왕으로 봉하여 축자국군筑紫國軍(구주의 군대) 500명으로 호송하고, 또 축자의 안치신安致臣, 마사신馬飼神들이 배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고 하였다.
이때 부형을 잃은 왜무왕, 무녕대왕과 청녕천황이 고구려 공략의 선봉에 선 것이다.
청녕천황과 무녕대왕이 고구려로 떠나던, 479년에 미에三重縣에 은거했던 웅략천황雄略天皇(418~479)이 죽었다. 위험인물이라서 죽였는지도 알 수 없다. 그의 고분은 75m의 원분이다.
동성대왕東城大王 모도대왕牟都大王 인현천황仁賢天皇은 이중천황履中天皇의 아들인 이치베노오시와왕市邊忍鹵王(416~458)의 큰 아들이다.
인현천황은 동생인 현종천황과 함께 몸을 피했다가 고모인 반풍황녀가 개로대왕비가 되니 고모를 찾아와서 각자궁角刺宮에 살고 있었다.
청녕천황은 그중 인품이 있는 첫째 인현천황으로 백제왕을 삼고, 반풍황녀의 아들인 무녕대왕으로 왜무왕을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청녕천황과 왜무왕의 고구려 정벌은 역사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청녕천황과 무녕대왕은 함경북도 청진淸津에 상륙하여 점거하고 그곳에 이름을 남겼다. 청진의 어원이 청녕천황이었던 것이다.
청녕천황은 일본에서 죽지 않았으므로 [고사기]에 그 서거 기록이 없다. 그러나 청녕천황이 된 백제 곤지대왕을 모시는 일본의 신사가 남아있는데 아스카베신사飛鳥部神社다.
飛鳥部神社
所在地 羽曳野市飛鳥(河内國安宿郡)
祭神 百濟王弟こん伎王, 古代のこの地は安宿郡賀美郷で
飛鳥部造一族の居住地で現在もその祖神を祀っている
現在の社地は小さな杜に過ぎないが
当時は氏の勢力も強勢であったことから
相当な有力神社であった
この地の有力渡來系氏族としては
飛鳥部造氏と上曰佐氏のニ氏がある
[신찬성씨록]에서는 이들의 후예를 백제 동성대왕의 후손이라고 기록했다.
[新撰姓氏錄]飛鳥部造、百濟末多王の後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