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시론
최근 김모 박사가 재야에서 역사 연구책을 내놓아서 강단사학을 비판하고 그의 주장이 틀리는 것과 강단사학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면 1억원을 내놓겠다고 광고하여 세간에 화제가 되고있다.
일단 강단사학의 출발은 대동강의 기자, 위만 조선을 이은 낙랑군과 황해도의 대방군을 바탕으로 고대사를 시작하니 두말할 필요없이 잘못되었다.
그러나 재야사학자로서 김모박사의 연구도 역시 매우 부실하다.
그는 환웅의 신시로서 적봉의 홍산을 적시하고, 단군 중심 아사달로서 조양시를 제시하였다. 이미 본인의 연구(졸저; 한국고대역사지리, 2005년 북캠프 출판)에서 홍산 부근의 신석기, 청동기 문화 유적을 밝히고 성터를 밝혔던 바가 있으며 환웅문화의 한 영역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본인은 홍산 동북쪽 천산 유역을 초기 신시로 규정한 바가 있다. 적봉시 홍산에도 비록 신석기 시대 석성 터가 남아있으나 태백산의 전설과 전혀 맞지 않으니, 이는 더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그는 단군 아사달로서 새로이 조양을 제시했는데 역시 성급한 면이 있다. 그 지역은 조양이라고 이름붙은 것이 청나라 때다.
조양은 342년 선비족 전연국의 2대황제가 도읍하여 처음에 “용성”이라 이름한 곳이고, 모용황에게 반란을 일으킨 모용인의 수하가 지키던 요동의 창려군을 항복시키고 창려군을 옮겨다가 만들었다.
384년 후연국 모용수도 도읍했으며, 모용희 황제가 자리잡고 고구려 요동성을 침략한 곳이다. 그후 북연이 서서 고운 황제와 풍발, 풍홍 황제가 자리했던 곳이다. 현재 풍발의 동생 풍소불 장군의 고분이 발굴되었고 기타 여러 모용씨 황제의 능이 조양시에 전해내려 온다.
풍홍을 멸망시킨 것은 북위국이었고, 이후 북위국은 임천술을 두어 지켰으며 고구려와 국경 지대였다. 조양시는 당나라를 거쳐 거란족이 장악했고,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가 흥중부를 두어서 지배했으며 금, 원까지 이어졌는데, 명나라는 지배하지 못했고, 청나라가 비로소 조양이라고 이름붙여 지배했다.
김모씨가 제시한 3-5세기 고구려 지도...요동국, 북연을 포함했다.
또한 그가 제시한 3세기말-5세기말 고구려 지도에 이곳 조양이 포함되어 있는데 지극히 잘못되었다. 그곳 조양에 내려오는 전연국, 후연국, 북연국 황릉이 있고, 이미 발굴된 북위 때 관리의 수많은 고분이나 조양시 동쪽 만불당의 암굴에 새겨진 북위시대 관리가 만든 석불상들이 있다. 즉 3세기말부터 5세기말 사이에 고구려는 이곳을 정벌한 적은 있어도 지배한 적은 없었다.
또한 그가 고구려 땅이라고 주장한 눈강 유역에는 5세기 대제국이었던 탁발선비족의 북위국의 고향이라서 성지가 있고 그들의 유적이 남아있다.
전연국, 후연국, 북연국, 북위 시대에 세워진 수많은 선비족 황제 고분들을 조양시에 그냥 두고서 고구려 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그가 그린 낙랑군 등 한사군 지도도 역시 틀렸다. 이유는 3세기 요동국의 성립으로 요동국의 낙랑, 대방, 요동군과 동시대 요동국 서쪽에 있던 삼국시대 조조의 위나라 사마염의 진나라의 요동군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가 그린 낙랑, 대방은 6세기말 수나라 초기 때의 낙랑, 대방이며 임둔, 진번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수양제의 침공으로 수양제의 요동군은 대릉하 하구 금주시에 세워졌다.
이제 <중국고금지명사전>에 의지하여 단지 지명 이름만으로 고대 역사 지명을 비정하는 재야사학계의 서투른 역사 고증은 그만두어야 한다.
서울의 파리 제과점이 4세기 프랑크대제의 수도는 아니지 않는가?
이제까지 역시 <중국고금지명사전>에 의해 제기된 왜곡된 주장으로서 “요동(遼東), 요서(遼西)” 라는 곳이 중국 산서성이었다는 주장도 있어왔다.
그러나 연개소문으로 항간에 알려진 “규염객전”에도 나와 있듯이 산서성은 당나라 고조 이연과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고향집이고, 규염객전에서는 태원성의 태원공자로서 이세민이 등장한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요동, 요서가 그곳 산서성이었다는 주장은 난감하다. 참고로 그 지역에도 요성(遼城)이 만들어졌는데 북위 태평진군 때로서 본래의 요동, 요서와 상관없는 곳이었다.
한편, 그가 조양시를 왕검의 아사달로 규정한 이유의 하나로서 그는 조양시라는 이름자외에 기존의 화려한 청동기 문명을 들었는데 조양시에는 청동기 문명으로서 12대영자 유적지, 위영자 유적지등이 있다.
그는 현재 요동 지역의 청동기가 조양등의 청동기보다 늦기 때문에 조양시가 단군시대 중심이라고 했는데 이는 근거가 없다. 비파형청동검의 초기 모습은 오히려 요양시, 무순시 등에 나타나며 이것이 발전해서 조양시의 청동검 모양으로 발전하고 있다.
물론 둘다 고고학계에서는 bc1000년 경으로 낮게 평가되고 있는데, 청동기의 나이를 잴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청동기 이전에 순동 제품들이 더 오래된 것인데, 이는 적봉시 홍산 부근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bc2000년 형태의 유적으로 나타나고, 그 다음으로는 구리칼이 나타나는 신민시 고대산문화가 빠르다.
고대산문화에서는 특히 북한이 단군 시대로 규정한 미송리형 토기(홍색무문토기)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고대산문화의 또다른 유적지는 부신시 서쪽 평정산 유적지로서 청동기시대 석성터와 구리 유물이 나왔다. 조양시 유적은 이보다 후대다.
강단사학계가 가짜 줄기세포 사단처럼 거짓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낙랑, 대방을 한반도에 두고 있다고 오늘날까지 전국민들을 가르치는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김모씨가 가짜 줄기세포 사단을 또 만들어서 저처럼 왜곡된 역사를 주장하는 것도 옳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