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비문

기자조선 황제 유물 발현

단군천사짱 2015. 2. 7. 19:11

기자 조선의 청동기 유물은 요녕성 객좌현에서 무수히 나왔다. 대개가 주대 초기 유물이었다.

http://daangoon.pe.kr/j2.htm 에서 기자 청동기 유물을 무수히 볼 수 있는데 매우 번성했던 것을 알수있다.

당시 기물에는 기후(箕侯)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기후 청동기 유물은 북경시 유리하 지역에서도 다수 나왔다.


이번에 발현된 유물은 

1.기자조선 문황제의 편종과 

2. 기자조선 문황제의 부황이 산동 기국에 하사한 편종이다.


높이 31cm의 기자조선 문황제 편종의 정면과 후면 사진



전국시대 편종은 앞 뒤에 명문을 새기는데, 국호와 주인의 작위를 먼저 새긴다. 초왕(楚王), 진왕(秦王), 등등이다. 위 편종은 국명으로 기자조선의 기箕를 사용했다. 

전면의 은상감된 문자는 갑골문이며 전면에 8자, 배면에 9자이다. 

정면; 기문황지화만년로箕文皇旨化萬年老 

배면; 황, 노황지문비노만년皇,老皇旨文妣老萬年

해석하면 箕文皇旨 기국 문황이 편종을 만들라 하여서 

           化萬年老皇 만년노황을 감화시켰고

           老皇旨 노황도 편종을 만들라 하였으니

           文妣老萬年 문황제 모후의 아름다운 만년을 위해서다.


기자조선 문황제 편종 명문에 의하면 

         1. 기자조선은 황제국이 되었다. 제후국이던 기자36세 가덕왕 기후(嘉德王 諱詡)가 기원전 342년 즉위하였는데, 야사인 [번한세가]에 의하면 연나라 공격을 북경 유주 계현에서 막아내고 323년 번한조선왕이 되었다고 전하는 바, 이때부터 황제를 칭한 것으로 고려된다.   

2. 기자조선 37세 삼로왕 기오(三老王 諱娛)는 기원전315년-290년까지 재위하고 양위했다.

3. 기자조선 38세 현문왕 기석(顯文王 諱釋)이 기원전290년에 즉위해서 부황과 모후를 위해 편종을 만들었다. 


다음으로 산동 청주 지방의 제후국인 기국(紀國) 편종이 발현되었는데 기자국문황제 편종과 크기만 다르고 똑같다. 상감한 봉황문 문양이나 문양의 위치, 조형부착물인 용의 또아리튼 모양과 도철문 문양이 똑같다.   


높이 23cm의 기국 노대 편종 정면과 배면

기국 편종의 명문은 정면에 3자, 후면에 4자이다. 

정면에는 기로대(己老大) 3자이고, 후면은 문로황지(文老皇旨)  4자다. 

앞의 기(己)는 청주의 기국(紀國)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중국은 노대(老大) 2글자를 병(竝) 1자로 읽어왔다.

그러나 글자가 노대老大 2자이고 이는 [후한서]나 [위지]<동이전> 중의 "예전"과 "진한전"에 나오는 최고 관직 삼로(三老)에 해당한다. 

즉 산동의 기국 제후는 기자조선의 제후로서 기자조선의 관작 노대를 받은 것이다.

배면에는 문로황지(文老皇旨) , 즉 기자조선의 문로황이 만들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문로황은 문황제의 부황인 삼로왕으로 고려된다. 앞에서 문비는 문황제의 어머니로 해석한 것과 같은 식이다.


기자조선 문황제편종과 기국노대의 편종은 같은 시대, 같은 기자조선 땅에서 만들어졌기에 크기만 다르고 똑같았던 것이다.

결론은 산동 청주의 기국은 기자조선의 제후국이었고 기자조선은 기후국(己侯國)이 받드는 황제국이었다.


그동안 긴가민가하던 기자 37세 현문황제와 38세 삼로황제의 명문이 기록된 두 편종이 세상에 나와 한국 최고의 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니 한국고대역사에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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