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년 근초고대왕의 아들 중애천황은 오사카를 지키다가
걸대왕의 아들인 성무천황에게 밀려나 구주로 피난갔고
362년 근초고대왕이 일본으로 와서 성무천황을 물리치고
스스로 응신천황이 되었다.
제 14세 천황으로 기록된 중애천황仲哀天皇(328~379)은 근초고대왕인 일본무존의 아들이다. 근초고대왕과 가야계 수인천황의 딸인 후타지노이리히메布多遅能伊理毘賣(297~363)가 중애천황을 낳았는데, 그의 이름은 타라시나가히코足仲彦였다.
중애천황은 왜국 중심인 오사카大阪에서, 걸대왕의 아들 성무천황의 반란을 당하여 355년에 구주九州로 쫓겨갔다.
성무천황은 중애천황의 구주九州를 마저 공략하려고 하였다.
백제의 근구수왕자는 성무천황에게 차라리 신라를 치라고 권유하였으나, 성무천황은 굳이 구주로 향하여 여육膐宍의 공국空國을 치러 왔다. 여육의 공국은, 혈육의 나라라는 뜻이니 중애천황의 땅 구주다.
이 성무천황의 구주 공격에 성무천황 후비인 신공황후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근구수대왕을 대신하는 주길대신住吉大神 등이 남아있어서, 중애천황의 구주를 지켜주었고 백제군은 신공황후를 포로로 잡았다.
뒤이어 근구수대왕의 공격으로 355년에 시작된 성무천황의 반란은 362년에 평정되었으며 근구수대왕이 응신천황으로 등극하였다.
성무천황이 다시 물러나 목숨을 부지한 곳도 역시 걸대왕이 물러나 있던 자하국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다.
[고사기]에서 중애천황은 362년에 죽었는데, 이 기록은 성무천황이 362년 6월에 강제로 퇴위된 것을 의미하고, 이후로 성무천황은 자하국 다카치호궁으로 물러나 370년에 죽었다.
중애천황은 355년에 구주로 물러나 379년경에 여생을 마쳤다.
중애천황의 후비였던 신공황후의 뱃속에 생겨난 응신천황에게 중애천황의 후사를 잇도록 하였는데 역시 조작이다. 응신천황은 신공황후의 새 남편으로서 근구수대왕이고, 태중에서 삼한왕이 된 신공황후의 아기는 우지노화기, 즉 백제 침류대왕이었으며, 침류대왕은 중애천황의 후사가 아니라 성무천황의 후사를 이엇다. 이 침류대왕이 경행천황과 성무천황의 자하국 다카치호궁을 잇도록 하여서 어린 침류대왕을 백자왕 세자라고 근초고대왕이 하사한 칠지도에 기록하였다.
조작된 일본 역사에서 중애천황비라고 했지만, 실제는 성무천황비였던 신공황후는 [일본서기]에서 389년에 101세로 죽었다고 하니 289년생이 된다. 그러나 326년생 성무천황이나 328년생 중애천황보다 무려 30여세가 더 많으니 크게 잘못되었다.
신공황후의 연대가 조작된 것이며 실제는 336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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