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대왕의 아들 성무천황 때에 일본 땅을 나누어서
수많은 백제 왕자들이 분봉을 받았다.
제 13세 천황으로 기록된 성무천황成務天皇(326~370)은 와카타라시히코若帶日子라고 한다.
경행천황이 야스카이리히메八坂入日賣命(275~328)를 얻어 황후로 삼아서 낳았다. 성무천황의 이름 와카타리시히코는 경행천황의 소왕자로 추정케 한다.
성무천황 때에 분봉分封이 많았는데 그 역시 분봉을 받은 일본의 지방왕이었을 것이다. 그의 영역은 경행천황에게 물려받은 자하국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 있던 오호쯔시大津市다.
근초고대왕의 장남인 호무야화기品夜和氣命(311~374)은 도쿄東京 부분에 분봉받고, 근초고대왕의 아들인 중애천황仲哀天皇(328~379)은 왜국 중심인 오사카에 분봉받은 것이 된다.
그리고 왜국 중심인 오사카大阪는 경행천황 때에 근초고대왕이 둔가屯家를 두어서 백제군대를 주둔시키기도 하였다. 이 곳은 주길대신住吉大神 3명이 함께 관리하였던 것으로 고려된다.
백제가 왜국을 나누어 국군國郡에 군장君長을 두고, 현읍縣邑에 수거首渠를 두었는데, 이때 여러 백제 왕자들에게 일본 땅을 분봉하였던 것이다.
수거首渠는 마한馬韓의 제도인 읍장 거수渠帥를 뒤집은 말이다.
앞서 경행천황의 아들들이 80명이라 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전역에 분봉받은 백제 왕가 출신의 제후였다. 80명이 다 실제 경행천황의 아들이 아니라 그때 백제에서 일본으로 간 왕실의 숫자라고 추정된다.
[고사기]에서 성무천황(326~370)은 355년 3월 15일에 세상을 떴다.
현재 발굴된 고분 기록인 370년과 맞지 않고, 또 고분 능비의 서거일자는 6월11일 45세로서 [고사기]에 기록된 중애천황의 서거일자다.
반대로 중애천황(328~379)은 [고사기]에서 362년 6월 11일에 서거하였다고 하는데 고분에서는 기묘년己卯年 3월15일 52세로 되어 있다.
기묘년을 [고사기]에 기록된 을묘乙卯로 보면 355년 3월15일이 되기는 하는데, 이는 [고사기]에 기록된 성무천황의 서거일이다.
즉 중애천황과 성무천황의 서거 기록이 [고사기]에서 서로 뒤바뀌어 있다.
게다가 중애천황의 후비였다는 신공황후는 성무천황 능 옆에 가까이 모셔져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중애천황과 성무천황의 서거 순서가 뒤바뀐 것이고, 신공황후 능의 배치는 신공황후가 성무천황의 후비였다는 증거가 된다. 붓끝을 놀리는 역사 조작은 가능해도 산능을 바꿀 수는 없었다.
신공황후의 또다른 이름인 오키나가타라시히메息長帶比賣와 관련하여서, 식장천息長川은 자가현滋賀縣에 있었으니, 지금의 천야천天野川이다.
즉, 신공황후와 성무천황이 같은 고향인 자가현滋賀縣에서 자란 것이다.
그뿐아니라 그녀의 아들인 침류대왕은 칠지도 명문에서 백자왕세자百慈王世子라고 하였다. 백자국은 경행천황에서 성무천황으로 이어졌고 신공황후는 바로 이 백자국의 비였던 것이니 근초고대왕의 아들인 중애천황의 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조작된 역사 속에서 중애천황과 성무천황의 순서와 역할이 서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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