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걸대왕은 조부 책계대왕의 원수인 부여왕 의라왕에게 빼앗긴 일본 본토를 수복하기 위하여 거울을 앞세운 전쟁을 하였다.
일본 수복 후에 백제 걸대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선비족 모용황의 침입으로 백제 부여 땅을 잃고 퇴위하여 일본에서 은거하였다.
제 12세 천황으로 기록된 경행천황景行天皇(273~358)은 백제 분서대왕汾西大王(재위298~304)의 아들 걸대왕契大王(재위343~346년)이다.
걸대왕은 분서대왕의 암살 당시에 32세나 되었으니, [삼국사기] 기록과 같이 어려서 즉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있어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지 못했고, 대신에 요양시에 위치했던 비류대왕이 즉위하였다.
평양의 백제대왕을 낙랑태수라고 한 것은 동진東晋에서 보낸 근초고대왕의 책명에서 나타나고, 그후 [양나라 직공도梁職貢圖]에도 백제 사신을 낙랑 사신이라고 기록해놓았다.
부여 의라왕의 침략에 의해 책계대왕責稽大王이 298년에 전사하고, 뒤이어 백제의 일본 땅을 부여가 침탈하였으므로 책계대왕의 손자인 걸대왕, 즉 경행천황은 대규모 병력으로 도일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경행천황의 자손이 80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 80명중에서 태자太子라고 불린 사람은 셋이었는데, 성무천황成務天皇이 된 와카타라시히코若帶日子命(326~370)와 야마토타케루 즉 일본무존日本武尊으로 일컬어지는 야마토오구나倭男具那(295~333) 그리고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 등이다. 이 중에서 성무천황이 된 와카타라시히코若帶日子命(326~370)만이 경행천황의 아들이다.
두번째인 일본무존日本武尊(295~333)은 백제 비류대왕의 쌍둥이 아들중 동생인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이다.
세번째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비류대왕의 태자였다. 그는 호무다노미와카品陀眞若(305~361)을 낳았고 그의 세 딸이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하였다.
그의 세 딸은 타카기노이리히메高木入日賣命(318~366)와 나카쯔히메中日賣命, 오토히메弟日賣命(324~368)인데,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한 오토히메가 384년생일 가능성은 없으므로 324년출생이 확실하고, 그의 조부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273년생이 되며 경행천황과 동갑이니 경행천황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비류대왕의 장왕자로서 백제 태자이며, 백제에서 숭신천황을 치기 위해 건너온 정벌군의 대장이었고, 그는 318년 6월에 숭신천황과 전투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고려된다.
오호야마토타라시히코日本足彦國押人天皇인 효안천황(222~298)의 사후에 그의 뒤를 이어서 백제 걸대왕이 일본에 가서 오호타라시히코大帶日子가 되었으므로 25세인 298년에 경행천황이 조왕인 책계대왕의 복수를 위해서 도일하였을 것으로 고려된다. 대물주신의 아들로 주장된 오호타타네코意富多多泥古가 경행천황일 가능성은 적다.
경행천황이 이나비노오호이라쯔메伊那毘能若郎女命(278~318)을 통하여 얻은 야마토네코倭根子命(302~348)와 카무쿠시神櫛王命(308~350)가 도일하여 초기에 얻은 아들들이다.
그보다 큰 아들로 기록된 쌍둥이 두 아들인 오호우스大碓命(295~318)와 일본무존日本武尊(295~333)은 비류대왕比流大王(재위 306~343)의 아들들이다.
구이대왕仇台大王(재위 234~238)의 아들 비류대왕이 343년에 죽고, 분서대왕의 아들 걸대왕契王이 343년에 백제로 돌아와 백제대왕이 되었다.
그러나 346년 초에 선비족 전연국의 모용황이 백제 부여부를 쳐서 부여왕 여현餘玄과 5만명의 포로를 끌어갔다. 343년 고구려 고국원왕의 환도성을 함락하고 5만명을 끌어간 모용황에 의해서 백제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鑒] 346년初,夫餘居於鹿山,為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燕王皝遣世子俊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皝以玄為鎮軍將軍,妻以女。
당시 부여는 이미 모용외 때에 멸망하여 대릉하 백랑산과 철령시 북옥저로부터 의려왕과 의라왕이 순차적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천황이 되었으므로, 이 부여왕 여현의 영토는 남옥저 지방으로 고려된다.
구이대왕묘仇台大王墓로 추정되는 위영지령魏令支領 고분이 백제 초기 벽화고분이므로, 그 고분이 있는 태자하太子河 요양시遼陽市가 당시 백제 대방왕의 수도로 고려된다.
위영지령 고분의 벽화도에는 제2부인으로 공손부인 초상이 있는데 구이대왕은 공손탁의 딸을 비로 맞이했었다. 또한 전체적인 고분 벽화 형식이 황해도 안악 3호분과 똑같다. 또한 대릉하 조양시의 고분 벽화와도 주제와 형식, 화법이 일치한다.
이 당시 모용황에게 약탈당한 부여성은 대방 지역으로 보아서 옛 대수帶水인 태자하太子河가 흐르는 요양시로 고려된다.
요양시 동쪽 본계현本溪縣에는 고대에 발해 삼로군杉盧郡 한양현漢陽縣이라는 지역 이름도 있었다. 삼로군 터에는 삼송산성이 남아 있고 한양현 위치는 환인현 오녀산성이다.
백제 걸대왕은 선비족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져서, 재위 3년만에 강제 퇴위 당하고 일본으로 다시 떠나가서 경행천황景行天皇이 되었는데, 전쟁에서 패전하면 왕이 죽거나 물러나는 것이 본래 부여인의 국법이다.
경행천황은 일본 정벌에서 거울을 앞세운 것으로 고려되는데, 경행천황의 지시를 받고 정벌에 나선 일본무존은 배를 타고 갈 때에 배 위에 큰 거울을 걸었던 사실이 있고, 계契, 걸契과 경景의 일본 발음이 “게이”로서 같고 “걸”은 우리말 거울 옛 발음일 수도 있다.
[일본서기]에서 경행천황의 이름은 오시로(於-斯呂, 忍-代)이며 그의 궁성 이름은 히시로日代 궁이었다. 시로는 흰색白의 발음과도 같다.
시로斯呂는 대代로도 썼지만, 백제 걸왕의 걸, 계契를 일본에서는 [게이]로도 읽지만 [시루시]라고도 발음했다. [일본서기/인덕천황기]의 원년 기록에서 후엽지계後葉之契의 契는 “시루시(=증표證票)”로 읽었다.
따라서 위덕왕이 된 백제 창昌왕과 같이 걸대왕의 본래 이름은 여설餘契, 혹은 여걸餘契이 되고 일본에서는 시로왕, 후에는 게이고우천황景行天皇으로 부르게 되었다.
경행천황은 효안천황처럼 이름 앞에 타라시帶를 경칭으로 썼는데, 경행천황은 키가 크고 특히 다리가 길었다고 [고사기]에 기록되었다.
[주] 비류대왕이 구수대왕(재위214~234)의 둘째 아들이라는 [삼국사기] 기록은 구이대왕(재위234~238)의 둘째 아들의 오기誤記로 본다. 구수대왕 사망년도에 태어난 비류대왕이라고 해도 서거 나이가 최소 109세가 되는 무리가 있는데, 하물며 둘째 아들이라면 더욱 무리다. 특히 구수대왕은 160년 초고대왕의 일본 정벌에 동행하여 대국주신이 되었으니, 그의 둘째 아들이라면 343년에는 180세가 넘는다. 286년에 서거한 고이대왕이 개루대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도 구이대왕의 아들이라야 상식적으로 되니, 개루대왕은 164년에 서거했기 때문에 그 아들이 286년까지 살기 어려운 것이다.
[주] 당시 백제에는 만주의 대방 지역과 부여 지역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찬성씨록]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신찬성씨록] 御池造; 出自百濟國扶餘地卓斤國主施比王也
[신찬성씨록]에서 백제 혜대왕惠大王을 주몽대왕 30세손이라고
[신찬성씨록] 出自百濟國都慕王卅世孫惠王也
했는데 [삼국유사]의 28대와 비교하면 혜왕 위에 사라진 두 왕이 더 있고 그중 하나는 추증된 시조 주몽대왕이 되니 다른 한 분은 구이대왕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백제 6대 구수대왕은 10세라고 했는데
[신찬성씨록] 出自百濟國都慕王十世孫貴首王也
고대에 칠七과 십十을 구별하기 어렵게 썼으므로 이를 7세라고 교정해서 보면 그의 앞에 주몽대왕 한 분만 있다.
따라서 구수대왕 뒤에 사라진 한분이 있는데
[삼국유사]에서 고이대왕의 즉위년을 기왕에 알려진 234년이 아니라 낙초樂初 2년 기미년 239년이라 하였으므로,
사반대왕의 즉위년을 238년으로 보아야 하고, 구수대왕(재위 214~234) 서거 뒤에 234년에서 238년까지 다스린 백제대왕이 비게 되므로 그 자리 8대 백제대왕 위치가 구이대왕 자리가 된다.
[주] 만주 대방 고지의 구이대왕은 공손탁의 딸을 후비로 들였고 인격이 훌륭하여서 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수서隋書][북사北史/백제전] / 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於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주] 이전까지 백제대왕은 고이대왕계의 책계대왕, 분서대왕, 걸대왕과 비류대왕계의 근초고대왕까지 교대로 즉위하였는데 걸대왕 이후 고이대왕계가 끊어졌다.
경행천황이 죽은 일본내 궁성 이름이 근기近畿의 자하국滋賀國 성이다. 칠지도에 기록된 백자국百慈國의 위치로 고려된다.
경행천황의 높은 이름은 그의 일본 정벌에 의한 것인데, 사실은 경행천황이 백제대왕으로 있을 때에, 그의 명령을 받은 비류대왕의 쌍둥이 둘째 아들, 일본무존日本武尊, 즉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295~384)이 대신 출정하여 정벌하였다.
또한 걸대왕의 마지막 영지는 오사카大阪의 대화大和가 아니라 자하국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므로, 343년 백제 걸대왕이 되었다가 346년 근초고대왕에게 양위하고 백제에서 되돌아왔을 때에는 왜국의 대표자에서도 밀려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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