랴오허강 서쪽 대릉하 북동쪽에 살던 부여국인들이 선비족의 전연국 모용외에게 망하여 부여국 의려왕이 부여국을 아들 의라왕에게 물려주고, 의려왕 자신은 대릉하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와서 효령천황이 되었다.
제 7세 천황으로 기록된 효령천황孝靈天皇(261~316)은 부여에서 온 의려왕依慮王이다. 285년에 일본에 도래하여 316년에 55세로 죽었다.
[한단고기桓檀古記/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주定州(발해 정주定州 = 심양시瀋陽市 북쪽 신대자新臺子 의로懿路)는 (부여왕) 의려국 도읍이었다.
선비족 모용외에게 패하여 도읍이 위태하니 의려왕 생각에
백성들이 있으니 어디간들 성공하지 못하랴?
아들 부라扶羅를 불러 도읍을 맡기고
백랑산白浪山(백랑수였던 대릉하의 산)을 넘어 바다를 건너가서
왜인들을 정벌하고 왕이 되었다.
혹은, 의려왕이 선비에게 패하여 바다로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아들들은 북옥저北沃沮(북옥저가 요하의 발해국 정주 위치다. 의라왕의 천도 전에는 대릉하에 있었다.)로 도망했는데 이듬해 아들 의라가 부여왕이 되었다.
다시 모용외에게 침략당해 백성들이 끌려가니(북경의 노예시장에서 포로가 된 부여인들이 팔렸다.) 의라왕이 수천명을 데리고 바다 건너 왜인들을 정벌하고 왕이 되었다.
定州依慮國所都...依羅 率衆數千 越海 遂定倭人 爲王
이 의려왕과 의라왕의 이야기는 [진서/부여전晉書夫餘傳]에 기록이 있다.
285년, 모용외가 습격하여 쳐부수니 의려왕이 자살하였다. 단, [한단고기]에 의하면 일본으로 갔다.
의려왕의 아들들이 옥저로 도망하였다. 이 옥저는 심양시瀋陽市 북쪽이며 의라가 있던 곳은 읍루고지挹婁故地라고 와전된 의로懿路다.
진무제가 “부여왕이 대대로 충성했는데 오랑캐에게 망했으나 그 후예들이 나라를 되살리도록 조치하라”고 말했다. 이는 선비족을 경계하기 위하여 선비의 배후인 부여를 살리려고 한 것이다.
앞서 부여를 구하는데 실패했던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을 파직하고, 새로 하잠何龕을 호동이교위로 임명했고, 의라왕이 하잠을 만나러 오니 하잠이 부하 고침賈沈을 보내어 선비족을 물리쳐서 의라가 부여국을 다시 세웠다. 그후 매년 선비 모용외가 부여인을 약탈하여 중국에서 팔아대니 무제가 불쌍히 여겨서 관의 재물로서 (부여인을 노예에서) 속환贖還시켜주고 사주司州와 기주冀州에서 부여인을 팔고사지 못하게 하였다.
윗글을 종합하면 285년경에 대릉하에 살던 부여국이 선비족의 침략으로 망하여서 의려依慮왕이 일본에 가서 왜왕(=효령천황이다.)이 되었다.
의려왕이 왜왕 효령천황이 된 시기는 효원천황의 아들 타케하니야스建波迩夜須毘古(248~287)가 패전하여 전사한 287년부터, 효안천황의 황비인 오시카히메押媛(235~288)가 죽은 288년으로 고려된다.
그후 의려왕의 아들 의라왕依羅王이 부여국을 정주定州 땅에 임시로 세웠으나 다시 선비족에게 약탈을 당하여 견디다 못해 역시 일본으로 가서 왜왕이 되었다.
여기서 나중에 도일한 의라왕은 아래에서 10대 숭신천황으로 확증이 되고, 의려왕은 7대 효령천황으로 고증된다.
부여국은 [위지/동이전]에서 예(穢huì)라고도 하였으며 예왕지인穢王之印이라는 국새國璽를 가졌었다. [요사/지리지]에서는 불열국(拂涅國 funie)이라고 하였고 요녕성 부신阜新市 서북 지방에 있었는데, 고구려 태조대왕(53~146) 때에 고구려의 중국 공격을 저지하고, 요동왕 공손탁公孫度(194年 卒)의 질녀를 왕비로 맞이했고 의려왕(285年)에 이르러 선비족 모용외에게 쫓겨 일본으로 갔다. 부여는 고구려 태조대왕의 중국 한나라 침공을 저지한 부여왕 위구대尉仇台의 후손이며, 위구대 이후에 간위거簡位居, 마여麻余. 의려依慮, 의라依羅로 부여왕위가 이어져왔다.
효령천황의 이름은 후토니(賊斗邇, 太瓊)이며 그의 수도는 구로다노이호토黑田盧戶궁이다. 이 분이 요서遼西의 부여夫餘(=阜新市)에서 선비족에게 패배하고 대릉하로부터 일본에 도래한 부여왕 의려왕依慮王이다.
그의 도성 려호궁廬戶宮은 의려依慮의 이름에서 비롯된다.
효령천황은 나라현 북갈성군北葛城郡 마판릉馬坂陵에 묻혔다.
[주] 부신阜新에 있었던 불열국拂涅國(funie)과 관련하여 효령천황의 이름 후토니(賊斗邇 = 후로알 = 홀알 = 太瓊)는 바로 불열(拂涅funie)의 차자다. 불(拂fÚ)의 발음이 일본식으로 후루賊斗, 후토賊斗가 되고, 열涅의 우리식 한자 발음이 얼(邇ěr), 현대 일본 발음으로는 니로 표기된 것이다. 후루賊斗는 홀忽, 즉 크다는 뜻이 있으니 홀한강 홀한성, 홀승골이 그 예다. 그래서 불열이 후토니賊斗邇를 거쳐서 큰-옥알의 태-경太-瓊으로 바뀌는 것이다.
[주] 한편 예(穢huÌ)의 중국 발음도 후이로서 유사한데, 예穢의 훈은 더러울 예이지만 본래는 거친 땅, 흙땅을 의미한다. 효령천황의 도성 이름 구로다黑田의 흙黑의 우리 발음 흘기와, 적두賊斗의 일본 발음 후토로 추정하여, 후토니왕은 현대 우리말로 흙알이나, 고대에는 흘알, 또는 홀(크다는 忽)알로 추정된다.
불열국의 열(涅nie)의 뜻은 “검은 진흙”이다. 이는 석탄에 해당한다. 부신阜新 지역은 석탄石炭 광산 지역이다. 노천탄광이 있다. 그래서 홀알왕은 한자어로 다시 불을 간직한 흙의 영혼, 지령地靈왕이 되는데, 뒤에 효령천황으로 고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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