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려왕으로부터 부여국을 이어받은 의라왕은 중국 동진의 도움으로 재건하여 다시 요하 부근에 나라를 세웠으나, 거듭되는 모용외의 침략으로 인하여 결국 수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와 숭신천황이 되었다.
의라왕의 이동 행로 중에 298년 백제 책계대왕이 전사하였고, 300년에 신라와 교류를 하였다.
숭신천황은 선진화 된 왕권 제도를 수립하고, 대마도에 처음으로 임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318년 백제의 반격으로 숭신천황은 죽고, 의라신사가 세워졌다.
제 10세 천황으로 기록된 숭신천황崇神天皇은 미마기 이리히고 이니에御間城入彦 五十瓊殖, 御眞木入日子 印惠(277~318) 천황이라고 하였다.
중국 동진東晋에서는 선비족 모용외를 견제하려고, 중국의 장군들을 파견하여 의려의 아들인 의라依羅를 다시 세워 옥저沃沮 부근에 부여국을 재건하였지만, 누차 모용외慕容嵬가 부여국을 쳐서 자몽지야紫蒙之野(=대릉하 조양시에 두었던 영주營州 12술戌 중에 자몽술紫蒙戌이라는 초소가 있었다.)를 빼앗고, 또 부여인을 약탈하여 중국에 노예로 팔아대고, 다시금 모용외가 북경 이북을 차지하고 끝내 중국 동진으로부터 모용외가 제후로 인정을 받아버리고,
의라왕은 요하 동쪽으로 옮겨 심양시 북계 의로懿路에 다시 의라국을 세웠다. 의라왕이 옮겨가서 살던 곳을 신당서는 읍루挹婁고지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의라依羅국 고지였다.
현재의 지명도 의로懿路(심양시瀋陽市 신성자구新城子區)인데 읍루, 의라, 의로 세 지명이 모두 현지 발음으로 yilou에 수렴한다.
의로懿路는 [대원일통지]에 의하면 그 아래에 모미현慕美縣이 있었으며, 모미현은 당나라 마미주磨米州였다. 고구려 미마나를 뒤집은 말이다.
마미주는 임나任那, 즉 미마나任那에서 비롯된 말이다.
임나는 서우여 번한의 4세손 번한 임나任那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당나라 때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미마나任那의 이름을 뒤집어서 마미주磨米州로도 불리운 것이다.
의라왕은 도망하듯 일본으로 떠난 부여왕 의려와는 달리, 꽤많은 신민과 군사들을 데리고 도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숭신기]에서 숭신천황은 왜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사도장군四道將軍을 파견하는데, 그 사도장군들 모두가 중국식 인수印綬를 가졌으므로, 이전까지 왜국의 형편과 비교되지 않는 선진 문명의 증거이다.
의라依羅에게는 국새國璽가 있었다. [진서晉書]에 소개된 부여의 예왕지인穢王之印이다. 이 예왕지인, 줄여서 예인穢印이라고 불러서,
[일본서기]에서 숭신천황의 이름자로서 이니예印惠가 기록되었던 것이다.
숭신천황 이름의 발음은 “이ㄴ예”로서 우리말에서 뒤집힌 것을 고려하면 예인과 일치한다. 또한 중국 발음으로 예(穢huÌ)와 혜(惠huÌ)가 일치한다.
게다가 의라(숭신)왕이 왜국 땅에 쌓은 첫 번째 제방을 의망지依網池라고 한다. 의라依羅의 라羅는 새그물이라는 뜻이 있는데 바로 그물 망網과 호환互換되는 한자이다. 천라지망天羅之網, 혹은 망라網羅라는 단어가 그 예다.
일본 발음은 망網과 라羅를 똑같이 “아마”라고도 읽는데 훈과 발음이 같은 것이다.
따라서 본래 이름은 의라지依羅池인데 후에 의망지依網池로 고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의망지 유적지依網池跡에는 대의라신사大依羅神社가 남아있으니, 대의라신사 의망지적大依羅神社 依網池跡이라고 한다.
숭신천황이 만든 의망지 위에 훗날 의라신사를 세운 것이므로, 숭신천황이 부여 의라왕인 것이 다시 확인된다.
숭신천황은 나라의 기근으로 인하여, 흉흉한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야계 아마테라스天照大神와 백제계 구수대왕倭大國魂神과 대물주신大物主神을 동시에 제사 지냈다. 즉 토착 백제세력을 선무한 것이다.
숭신천황은 국가적으로 호구 조사를 처음 실시하고 그에 따른 과역을 부과한 최초의 왕이다. 또한 그의 도읍을 처음으로 제도帝都라고 하였다.
숭신천황 말년에 임나국任那國에서 소나가시치蘇那曷叱智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숭신기]에서 임나는 축자국筑茨國과 2000리 떨어져 있고, 임나의 북쪽에 바다가 있으며 신라의 서남에 있었다고 하였다. 즉 대마도다.
대마도에 인위가라仁位加羅가 있었고 최초의 임나가라였다. 인위仁位의 우리말 발음 이뉘가 숭신천황의 우리말식 이름 이니예와 같기 때문이다.
[수인천황기]에서는 이 임나인 소나가시치가 조공하러 와서 왜왕을 자칭하는 이쓰쓰히고伊都都比古(이도국의 왕)에게 억류되었다가 수인천황을 찾아오게 되었다.
대마도는 이미 숭신천황의 영토였고, 수인천황 천일창은 시마네현 동쪽 단마국但馬國에 있었다. 이쓰쓰히고伊都都比古는 축자筑紫의 숭신천황이었을 것이며 숭신천황의 사자로서 천일창을 회유하러 찾아간 것이 된다.
훗날 고구려가 대마도를 치고 임나연정을 설치하였다.
위를 종합하면 의라왕이 왜국 땅에 오면서 도중에 대마도를 중심으로 임나를 건설하였고 얼마 후에 사도장군을 파견하여 일본 열도를 정복하고 천황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가야국이 어느날 갑자기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주장되는 것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인데, 그 근원을 숭신천황에게서 찾을 수 있다.
임나대마도와 가라국은 원래 별개였고, 임나를 인위가라, 혹은 임나가라라고도 하였을 뿐이며, 이는 부여의 의라왕이 일본 땅에 도래하면서 중간 기착지에 명명한 지명이다.
이 이름이 확산되어 한반도 남부까지 임나가라로 발전한 것이다.
[고사기]에서 의라(숭신)왕에 이르러 왕의 서거연도를 처음으로 기록하였는데 무인년 12월로 기록되었으며 이는 318년 12월에 해당하며 숭신천황 고분의 묘지 기록 무인년 12월 7일과도 일치한다.
의라의 요하 서쪽 불열국왕 즉위는 모용외에게 부왕이 침탈을 당한 285년경이었고, 동천東遷하여 요하 동북쪽의 의려국 고지 의로에서 개국하여 있다가 수년간 준비하여 298년부터 도일하게 되었다.
일본의 숭신(의라)왕기는 서기 300년에서 318년까지다.
숭신천황의 서거년인 318년에 대혼란이 있다.
318년 3월에 비류대왕의 아들이자 근구수대왕의 쌍둥이 형인 오호우스大碓命가 24세로 전사했다. 백제의 일본 탈환 전쟁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318년 6월에 백제 정벌군의 대장이자 비류대왕의 태자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가 전사했다. 이는 뒷장에 자세하다.
318년 10월에는 대물주신 효안천황의 부인이었던 야마토모모소가 죽었는데 그녀를 위해 거대한 전방후원 고분이 세워졌다. 백제계가 다시금 득세한 것이다.
마침내 318년 12월에 숭신천황이 죽음으로서 부여계의 일본천황 시대는 종막을 고한다.
조작된 일본 역사에서는 수인천황이 숭신천황의 아들로서 이어가지만 실제 수인천황은 가야계 천일창이었으므로 숭신천황의 아들도 아니고 숭신천황보다도 선대이다.
[주] [대원일통지]에 기록된 발해 모미현慕美縣은 중국 심양시 서북쪽 삼도강자진三道崗子鎭으로 추정한다. 현지 지명 랑미포狼尾浦가 마미(馬尾, 磨米)의 후신으로 추정된다. 숭신천황의 고향 이름이 바로 이 만주의 임나, 미마나彌摩那였던 것이다.
[주] 한편 의라왕의 옥저 이주로 인한 동천東遷은 고구려나 백제가 달가와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의라국은 철령시 의로에도 오래 있지 못하고, 역시 일본으로 떠나서 일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주] 실제로 서기 298년경 백제 책계대왕의 전사는 맥인貊人과 한인漢人의 침입 때문이었으므로 바로 의라왕과의 전쟁 결과로 추정된다.
의라왕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신라와도 교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기 300년경 [삼국사기] 신라 기림왕基臨王 때 기사에서 낙랑,대방 양국樂浪帶方兩國이 귀복하였다는 것이다. 본래 낙랑 지방은 의라국이 세워져 있던 만주이다.
그런데 의라의 남천으로 한반도 남해안 일대에 새로운 낙랑(=낙안읍樂安邑, 순천시順天市), 대방(남원시南原市)이 생겨났던 것이고, 즉 서기 300년에 의라왕이 일본으로 건너가다가 한반도 남부 가야에 일부 영토를 잡고 뿌리내린 것이다. 따라서 그의 도일 시기도 300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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