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거등왕의 아들 선견왕자는 사반대왕의 딸인 아카루히메와 가야에서 결혼하였는데 아카루히메가 도망하자 일본에 쫓아와서 천일창, 아메히노호코天日槍이라고 하였으며 일본에서 구주 이도국에 영지를 받아 이도국왕이 되었다가
효고현의 타지마국으로 옮겨서 타지마국왕이 되었고
백제계 효안천황이 부여계 효령천황에게 밀려 물러나자 그 스스로 경도에서 수인천황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부여계 숭신천황에게 밀려나서 대마도의 임나왕으로 물러났다.
수인천황의 딸 왜히메倭比賣命(277~366)와 후타지노이리히메명布多遲能伊理毗賣命(297~363)의 나이를 보면, 11세 천황인 수인천황(240~310)은 7세 천황인 부여계 효령천황 등의 도래 훨씬 전인 250년대말에 이미 일본에 진출하였다. 따라서 수인천황이 10세 천황인 숭신천황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조작이다.
천일창, 수인천황은 본래 대가야意富加羅(=大伽倻)에서 온 왕자로서, 가야국 2대왕 거등왕居登王(재위 199~259)의 아들 선견왕자先見王子다.
김해의 김수로왕 신전인 숭선전崇善殿에서 나온 [김씨왕세계]에 의하면 “선견先見이라는 이름의 왕자가 신녀神女와 더불어 구름을 타고 떠났기 때문에 거등왕이 강에 있는 돌섬의 바위에 올라가 선견왕자를 부르는 그림을 새겼다. 이 때문에 속전俗傳하기를 초선대招仙臺라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인천황垂仁天皇의 이름은 이쿠메(伊久米, 活目)-이리入히코-이사찌伊佐知, 또는 이사-가모五十狹-茅(日矛= 일창一槍)이다.
수인垂仁은 선先의 연음으로 고려되며, 이사치의 사치는 선先의 현재 일본발음 “사기”와 관련된다. 신무천황 때에 대마도에는 가야식 관직으로 해사치海佐知가 있었는데 불합존不合尊이라고도 했으며 대마도주對馬島主였다.
그는 본래 대가야의 왕자 쯔누가아라사도都怒我阿羅斯等, 다른말로 우사기아리질지간지于斯岐阿利叱智干岐라고 말했고, 또는 신라왕자 천일창, 아메노히호코天日槍이라고도 불렀다.
우사기아리질지간지于斯岐阿利叱智干岐는 그가 구주九州의 이도국伊都國을 통치할 때 가야의 관직명이고, 쯔누가아라사도都怒我阿羅斯等는 그가 후쿠이현福井縣 쯔누가시敦賀市에 상륙했을 때의 가야 관직명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마도를 다스릴 때 가야 관직명이 간지干岐보다 아래급인 이사치伊佐知일 것이다.
그의 시호인 이쿠미伊久米, 이사치伊佐知에서 이伊는 크다는 듯의 접두어이고 구미久米가 금金씨 성姓을 의미한다. 잇금, 이사금도 관련될 수 있다.
선견왕자가 신무천황에게 밀려서 가야로 피난 온 효원천황의 동생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가 파혼하고 돌아가니 그녀를 쫓아서 일본까지 찾아왔던 것인데 그 신녀 아카루히메阿加流比賣가 바로 효안천황의 딸이며 효원천황의 동생인 사하지히메沙波遲比賣(249~272)인 것이다. 사하지히메가 불타죽은 성은 도성稻城이다. 효소천황孝昭天皇의 이름이 [일본서기]에는 도천황(觀松彦香殖-稻天皇)이라고 했다. 수인천황에 의해 불타버린 도성稻城이 사하지히메의 부왕인 효소천황의 성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신사가 난파와 구주 등등 여러 곳에 남아있으니 제사장이었다.
왜여왕 일여壹與(=개화천황開化天皇)는 고모부이자 외삼촌인 선견왕자 천일창이 가야에서 건너오니 구주에 살도록 허가하였다. 그가 일본에 와서 처음 살던 곳은 구주의 서북부 이쯔국伊都國이었고 그리하여 천일창을 이쯔국伊都國의 시조라고 한다.
그런데 도망간 사하치히메는 백제계의 중심인 오사카에 살고 있었고, 천일창이 오사카로 들어가는 길은 개화천황이 허락하지 않았다.
천일창은 북쪽 해안으로 돌아서 쯔누가시敦賀市에 상륙했다가 오사카大阪에 장수를 보내어 사하치히메가 살던 도성稻城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그후 효고현兵庫縣의 타지마국但馬國을 점령하여 천일창은 타지마국의 시조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궁은 타지마국但馬國의 출석신사出石神社였다.
수인천황은 이웃한 단파국丹波國의 다섯 여인을 들여 비로 삼았고 그중 히바스히메氷羽州比賣(252~293)를 황후로 세워서 왜히메명倭比賣命(277~366)을 낳았는데 왜히메명은 훗날 신녀가 되어 근초고대왕, 즉 일본무존日本武尊을 도왔다. 또 수인천황은 오토카리하타토베弟苅羽田刀辨命(272~314)와도 결혼하여, 근초고대왕의 부인이 된 후타지노이리히메명布多遲能伊理毗賣命(297~363)을 낳았다.
287년 부여의 효령천황이 도일하여, 오사카의 효안천황이 패배하고 미와산에 들어가 대물주신이 되었을 때에, 그가 오사카의 북쪽인 경도京都에 들어가서 스스로 천황天皇이라고 칭하였을 것으로 고려된다.
이사伊佐, 우스于斯는 구슬珍珠을 의미하고, 그의 궁성은 주성궁珠城宮이었는데 그의 주성궁은 경도부京都府 구세군久世郡 구미산정久御山町에 주성신사珠城神社로 남아있다. 구세군이 구슬군이고, 구미산정은 그가 김해에서 온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300년에 숭신천황이 들어와서 그를 경도 주성궁에서 대마도로 쫓아내고 대마도왕으로 살게 하면서, 대마도를 임나任那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의 시호가 이사치伊佐知로 격이 낮아진 것이다.
그림
9) 거등왕이 선견왕자, 천일창을 기다렸다는 김해 초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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